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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지 323호] 2차 송환을 희망하는 선생님을 찾아뵙다

작성자 양심수후원회 등록일 2018-11-08 조회수 127회 댓글수 0건

2차 송환을 희망하는 선생님을 찾아뵙다


김혜순_회장


고향이 북녘인 한 독지가가 2차 송환을 희망하는 19명의 장기수 선생들께 후원을 했는데 이것을 전달하고 선생님들께 인사를 드릴 목적으로 지방에 계신 몇 분의 선생님을 찾아 나섰다. 첫 행선지는 전주와 청주다. 

8월 20일 한낮의 폭염을 뚫고 김재선 부회장 차로 권오헌 선생님과 오기태 선생님을 뵈러 전주로 향했다. 점심 때가 돼서야 전주의 한 임대아파트에 도착, 선생님을 모시고 식당으로 향했다. 선생은 체격은 작지만 아주 단단해 보였는데 2005년 급성폐렴으로 죽을 고비를 넘겼고 2008년에는 대장암으로 고생을 한 터라 건강을 위해 매일 꾸준한 산행과 운동을 한다고 했다. 그동안 “처와 자식들이 살고 있는 함경북도 온성군은 접경지대라 두만강만 건너면 갈 수 있는 곳입니다. 두 번이나 중국에 가서 두만강을 건너려 했습니다.” 하지만 전주에 계시던 장기수 선생들에게 누가 될까 봐 실행하지는 못했다고, 돌아갈 날을 소망하며 건강에 힘쓰고 있다 했다. 전주의 서은숙 회원이 녹두 넣은 삼계탕을 사드렸는데 한 그릇을 깨끗하게 비우셨다. 


짧은 만남을 뒤로 하고 간 곳은 청주의 재활병원이다. 음성에 살던 김동섭 선생님이 뇌졸중에 폐렴 증상까지 더해져 병원 치료를 받고 있다. 환자복을 입은 선생은 4인용 병실 침대에 누워 있었다. 코에는 음식물을 식도까지 전달하는 튜브가 꽂혀 있고 눈빛은 창백했지만 깨끗하신 모습에서 사모님의 정성어린 돌봄이 느껴졌다. 권오헌 선생님을 알아보고 눈인사도 나누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간간이 말씀도 했다. 해방 후에 중국지원군에서 활동했던 선생은 중국에 가면 살길이 보장되지만 가족들의 반대로 가지 않았다고, 1차 송환 때도 마찬가지라고 하셨다. 이번에는 건강을 회복하셔서 꼭 가시길 기원하며 길을 나섰다. 지난 2월 미주 일일찻집 후원금 10만원도 이번에 함께 전달하고 왔다. 이해를 돕기 위해 두 분의 약력을 싣는다. 


오기태 선생은 전남 신안군 임자도에서 3남 2녀 중 둘째로 태어나 6·25 전쟁 때 빨치산 활동을 하던 형의 권유로 의용군에 입대했다. 전쟁이 끝나고도 한동안 군에 남았다. 1957년 군을 제대한 후 김외식 씨(84)를 만나 결혼, 한반도 최북단인 함경북도 온성군에 자리를 잡아 슬하에 4남매를 두었다. 군 인민위원회에서 일하던 선생은 1969년 중앙당에 소환돼 대남공작원으로 남파되었다. 남파 당시 큰아들이 국민학교 1학년이었고 넷째가 아내의 뱃속에 있었다. 임무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발각돼 21년을 복역한 후 1989년 크리스마스 특사로 풀려났다. 


김동섭 선생은 1930년도에 독립운동을 하던 아버지의 등에 업혀 만주로 나왔고 해방 후에는 중국지원군에 입대 장개석 군대와 싸웠다. 1950년 3월 돌아와 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인민군에 입대해 그해 9월에 경남 함안에서 부대와 합류했지만 후퇴를 하고 말았다. 1952년 2월에 지리산으로 들어가다 포위망에 걸려들어 결국 체포되었다. 사형 선고를 받았지만 감형되어 감옥에서 21년을 살고 출소.


후원금을 빨리 전달해야 해서 일주일에 두 번이나 지방 나들이를 했다. 24일엔 광주의 서옥렬 선생과 이광근 선생, 나주의 이두화 선생을 뵈러 갔다. 운전은 김호현 전 회장이 맡고 권오헌 선생님과 이정태 운영위원 이렇게 4명이 출발했다. 몇 달 전에 폐에 물이 차올라 병원신세를 졌던 선생은 퇴원해서 각화동 집에 계셨다. 서옥렬송환추진위 위원장인 장헌권 목사님과 이광근 선생을 집 앞에서 만나 반갑게 인사를 하고 올라갔다. 선생은 많은 사람이 찾아가니 어리둥절하다가 차츰 인사도 하고 말씀도 하였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호현이 너 요즘 사업 잘 되냐?” 하는 말이었다. 오랜 세월을 함께 해온 사람만이 가지는 어떤 교감, 선생은 김호현 전 회장을 대번에 알아보고 안부를 물었다. 식사는 두유나 미음 등 부드러운 것으로만 하였다. 서옥렬 선생님을 뵈며 ‘선 채로 기다리기엔 세월이 너무 길다.’는 노래가사가 떠올랐다. 기다림이 너무 길어 선생님은 바싹 말라가고 있었다. 광주지역의 활동가들이 특유의 끈끈함으로 선생님을 잘 돌보 거라고, 그렇게 바라며 떨어지지 않은 발걸음을 옮겼다. 


나주의 이두화 선생님은 나주 남평읍에 살고 있는데 선풍기 하나에 의지해 더운 여름을 나고 있었다. 말씀은 차분하게 하셨지만 걷는 게 많이 불편하다고 했다. 지로용지로 후원회 회비 1만원을 납부하기 위해 유모차에 의지해 남평우체국까지 다니셨을 생각에 마음이 짠했다. 거동이 어려워 10월쯤 광주의 한 요양원으로 가실 예정이라고 하였다. 평양 김일성대학을 다니던 중 인민군을 따라 후발대로 내려온 선생이 피붙이 하나 없이 남쪽에서 시간을 보낼 생각에 마음이 아팠다. 


이광근 선생은 광주에서 송환될 날을 기다리며 결혼도 안 하고 지내신다. 출소 후부터 해온 옷수선 등 미싱일을 하고 계신다고 한다. 바깥으로는 건강해보이셨다.  


서옥렬 선생은 전남 신안에서 5남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나 고려대 3학년 때 학도병으로 북한 인민군에 편입돼 참전했다. 전쟁이 끝난 뒤에는 강원도 천내군의 중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고 1955년 같은 학교의 강순성과 결혼했다. 1955년 12월부터는 김일성종합대학교 정치경제학과에서 수학했고 졸업 후에는 평양의 간부양성소에서 일했다. 선생은 30대 초반이던 1961년 8월 9일 아내와 두 아들(당시 5살·3살)에게 인사도 하지 못한 채 공작원으로 남파됐다가 가족을 만난 뒤 월북하다 붙잡혔다. 1974년 선생은 고문 후유증으로 왼쪽 눈의 시력을 잃었다. 30년의 수감생활을 마치고 출옥.


이광근 선생은 2차 송환을 희망하는 19명의 비전향장기수 중 가장 나이가 어리다. 유일한 70대다. 선생은 평양에서 3남 1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평양통신전문대학을 졸업한 후 군에 들어갔다. 전쟁 때 사망한 큰형 때문에 당성과 사상성 등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스물두 살이 되던 1967년 남파되었다가 임무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체포되었다. 1988년 12월 선생은 22년의 감옥살이를 끝내고 출소했다. 어릴 적부터 옷을 만들고 싶었던 선생은 교도소 안에서 재봉 기술을 배우기 시작해 지금도 그 일로 생계를 이어간다.


이두화 선생(1928)의 고향은 함경남도 함주군 천원면이다. 5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부친이 교장으로 있던 나진여고를 졸업하고 김일성대학에서 조선사를 전공했다. 대학 3학년 때 전쟁이 일어나자자 대학생 신분으로 전남 무안군에 선전 활동에 나섰다. 선생은 인천 상륙작전으로 돌아갈 길이 끊기자 영암 월출산으로 들어갔다. 휴전협정이 체결된 해인 1953년 가을에 지리산으로 들어갔다가 이듬해 봄에 체포되었다. 광주형무소에서 3년을 복역했다. 30살에 출소한 선생은 32살에 빨치산 활동을 함께 했던 최장열 선생과 결혼해 나주에 정착했다. 전남 곡성군 옥과면을 오가며 사립 고등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쳤다. 남편도 지난해 세상을 떠나 이제 혼자뿐이다. 


8월 28일에는 권오헌 선생님과 김재선 부회장이 파주 요양원에 계신 박정덕 선생님을 뵙고 후원금을 전달하고 왔다. 안 아픈 곳이 없다고 하시는데 밖으로는 비교적 건강해 보였으며 그곳 생활에 만족해하셨다고 한다. 2000년대 초반에 진도에 역사기행을 함께 했는데 그날 밤 의자에 앉아 마이크를 붙잡고 노래를 부르던 선생님의 정정한 모습이 차츰 사라져가니 아쉽고 또 아쉽다. 


박정덕 선생의 고향은 전남 곡성군 죽곡면 당동리다. 1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17살에 위안부로 끌려가지 않으려고 아버지가 정해준 사람과 결혼했다. 당시 활발한 좌익운동가였던 남편은 결혼식 날을 빼고는 경찰을 피해 입산해 생활했다. 1948년 여순사건이 일어나자 좌익운동을 하던 시숙과 오빠까지 산으로 피신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고서야 고향으로 돌아와 남편은 석곡면당 위원장으로, 선생은 여맹 선전부에서 활동하다 공세를 피해 지리산으로 숨어들었다. 1952년 2월 9일 산속으로 피해 달아나던 선생은 100m가 넘는 빙판으로 굴러떨어져 다리가 부러졌다. 선생은 체포된 이후에 썩은 오른쪽 다리를 절단해야 했다. 광주형무소에서 7년형을 살고 1959년에 출소했다. 이때 선생의 나이는 29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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