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9일을 아시나요?’ | ||||
<기고> 한상권 덕성여대 사학과 교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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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권 / 덕성여대 사학과 교수
2. 의거 3일 전인 1932년 4월 26일, 청년은 자신의 의거가 개인적 차원의 행동이 아니라 한민족 전체의사의 대변이라는 점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백범 김구 선생이 주도하던 한인애국단에 가입한다. 이어 “나는 적성(赤誠: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참된 정성)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중국을 침략하는 적의 장교를 도륙(屠戮)하기로 맹세하나이다.”라는 선서를 하고 최후의 준비를 서둘렀다. 3. 거사일인 4월 29일 아침, 청년은 백범선생과 마지막 아침식사를 하고 시계를 바꾸어 갖는 여유를 잃지 않았다. “때마침 7시를 치는 종소리가 들렸다. 윤군은 자기 시계를 꺼내 내 시계와 교환하자고 했다. ‘제 시계는 어제 선서식 후 선생님의 말씀을 따라 6원을 주고 구입한 것인데, 선생님 시계는 불과 2원짜리입니다. 저는 이제 1시간밖에 더 소용없습니다.’ 나는 기념품으로 그의 시계를 받고, 내 시계를 그에게 주었다.(……) 나는 목 메인 소리로 마지막 작별의 말을 건네었다. ‘후일 지하에서 만납시다.’ 윤군이 차창으로 나를 향하여 머리를 숙이자, 자동차는 엔진소리를 높이 울리며 천하영웅 윤봉길을 싣고 홍구공원으로 질주하였다.”(백범일지, 336쪽) 4. 홍구공원에 수많은 인파가 운집하였고 삼엄한 경계가 겹겹이 처져있는 가운데, 오전 11시 40분 경, 청년이 앞 사람을 헤치고 나아가 단상위로 폭탄을 투척하였다. 천지를 진동하는 굉음과 함께 식장은 순식간에 수라장이 되었다. 이날 오후 두세 시경에 다음과 같은 신문호외가 터져 나왔다. 홍구공원 일본인의 경축대 위에서 대량의 폭탄이 폭발하여 민단장 가와바다(河端)는 즉사하고, 시라카와(白川) 대장, 시게미츠(重光) 대사, 우에다(植田) 중장, 노무라(野村) 중장 등 문무대관이 모두 중상 운운. 상해파견군 사령관 시라카와 대장도 이후 사망하였다. 당시 가와바다는 상해 일본인 거류민단장, 노무라 중장은 제3함대 사령관, 우에다 중장은 제9사단장이었다. 5. 청년의 이 쾌거는 곧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중국의 장개석 총통은 “중국의 백만 대군도 못한 일을 일개 조선청년이 해냈다”며 감격해 하고, 종래 무관심하던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하였다. 그리하여 중국육군중앙군관학교에 한인특별반을 설치하는 등 한국의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성원하였다. 또한 한동안 침체일로에 빠져있던 임시정부가 다시 독립운동의 구심체로 역할 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것도 청년의 의거에 힘입은 바가 컸다. 6. 체포된 청년은 가혹한 고문 끝에 그 해 5월 25일 상해 파견 일본군법회의에서 사형을 받고, 이후 일본 오사카로 호송된 뒤 12월 19일 25세의 젊디젊은 나이로 순국하였다. 가나자와시에 있는 청년의 암매장지는 자유・평등・평화사상을 전파하는 성지가 되어 참배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7. 내일 19일이면 청년 윤봉길 의사가 순국한 지 80주년이 된다. 마침 이 날은 앞으로 5년간 대한민국을 이끌고 갈 대통령을 뽑는 날이기도 하다. 민주주의는 참여를 통해 발전한다. 부디 많은 사람들이 투표에 참여하여 윤 의사가 목숨을 걸고 이루려했던 자유・평등・평화의 민주주의 세상을 앞당겼으면 하는 바람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