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의 발견> 평생을 ‘양심수의 대부’로 인권, 통일운동가로 생을 바쳐온 권오헌 명예회장은 기록을 매우 중시하는 분이었다. 매일의 활동을 대학노트에 꼼꼼히 적는 습관은 삶을 마감할 때까지 이어졌다. 후원회 소식지에 실을 활동일지 원고도 눈에 보이지 않아도 손감각으로 흐트러짐없이 매월 10장이 넘는 분량을 산출했다. 후원회가 만들어져가는 과정을 적은 메모들, 장기수를 포함한 양심수들과 주고받은 편지, 민중민주운동사를 가늠할 여러 자료들이 보물처럼 쏟아졌다. 이렇게 모아둔 기록물이 25년 여름 5톤트럭 2대에 실려 성북구 인수동 홍익빌라 202호에서 낙성대 만남의집으로 옮겨졌다. 이제 그 자료들을 정리하고 목록화하며 숨쉬게 만들어야 할 책임을 맡게 되었다. 아카이브 봉사자들을 모으기 시작했고 26년 3월부터 자료들의 정리를 시작했다. 2000년 송환되신 선생님들의 생활공동체였고 현재도 여전히 만남의집을 지키고 계신 비전향장기수 선생들! 그분들의 기록들도 함께 아카이빙을 하고 있다. 이 소중한 기록자산을 잘 보존하는 일이 양심수후원회의 역할이기도 하다. 과거를 만나는 일은 가슴 뛰는 일, 현재를 새롭게 해석하는 일! 그 일을 감당해 내고 있는 봉사자들의 손길에서 피어난 감동을 전하기 위해 이 ‘기록의 발견’ 코너를 새롭게 만든다. |
신념으로 지킨 양심의 숨결을 기록하다
김태임_양심수후원회 운영위원
나는 양심수후원회 아카이브팀 일원으로 2월부터 일주일에 2~3번씩 기록작업에 합류하게 되었다. 제일 먼저 만난 사료가 안영기 선생이 감옥에서 출소할 때 지고 나온 망태기였다. 이 유물이 어떻게 만남의집에 남겨지게 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선생은 과천 한백의 집에 계시다가 2000년 9월 2일 북송되었다고 한다. 다만 선생들이 송환될 때 일부 자료들을 낙성대 만남의집에 맡겨두지 않았을까 조심스레 추측해볼 뿐이다.
낙성대 만남의집 안방 창고, 그 어둠 속에서 25년을 지낸 안영기 선생의 망태기가 올해 봄 세상 밖으로 나왔다. 무명천 주머니 두 개를 이어 붙여 손수 바느질해 만든 망태기 안에는 선생님의 37년간의 감옥생활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3530 안영기’ 크라프트지에 단단한 붓으로 정자체로 쓰여진 수형 번호와 이름은 선생님의 신념만큼이나 단단해보였다.
왜 그리 소중히 보관하고 계셨을까? 바깥 소식을 전해주던 유일한 것이었을 편지들은 다발들로 나눠 묶여 있었다. 봉투와 편지는 바스러질 듯 낡아서 손으로 만지기도 조심스러웠다. 선생님의 소중한 유품이 망가질까 봐 편지 봉투 하나 편지지 한 장에 미치는 손길도 숨죽여야 했다.
남동생과 누나, 여동생이 보낸 편지들로 선생님의 가족사도 엿볼 수 있었다. 오래 작업을 하다보니 마치 퍼즐이 맞추어지듯 가족관계도를 그려낼 수 있게 되었다. 막 결혼한 신혼부부 사진, 갓 태어난 조카의 백일사진, 글짓기에 재능이 있었던 여동생의 동화 당선작을 필사한 원고지 뭉치들...이렇게 동봉된 편지들이 감옥에 갇힌 선생님이 신념을 지키는 데 큰 힘이 되었을 것이다. 한 봉사자는 망태기에서 편지 뭉치가 나올 때마다 작업을 멈추고 눈물을 흘렸다.
감옥에서 받았던 재판 기록물과 결정서, 항소이유서, 종교단체와 시민단체 그리고 새내기 대학생들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선생님께 편지를 보냈다. 편지와 마음을 담아 보낸 영치금 확인증까지, 감옥에서 나올 때까지 무엇하나 소홀히 대하지 않고 작은 메모까지 소중히 보관하고 있었다.
선생은 송환된 지 9년 뒤인 2009년 사망했다고 전한다. 인연의 고리가 없었던 선생의 유품이 불시착한 비행기처럼 나에게 온 까닭은 무엇일까? 고난의 세월을 이겨낸 선생의 일상이 우리에게 남겨진 이유는 무엇일까? 선생이 지켰던 신념의 역사가 현재를 사는 우리들의 든든한 뿌리이고 미래를 가꾸는 삶의 이정표가 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오늘도 그 신념으로 선생님의 양심의 숨결을 기록하고 있다.
<안영기 선생님 약력>
1929년 6월 19일 경상북도 선산군 선산면 송부동에서 태어남
1950년 4월 경남상업중학교 졸업(2회)
1950년 9월 조선인민군 복무(3년)
1953년 10월 조선인민군 제대
1958년 평양건설대학(김책공대 전신) 건축공학부 졸업
1958년 평양 도시건설사업에 참여하여 옥류관 등을 건설함
1962년 평양에 아내와 두 딸을 남겨두고 공작원으로 남파되었다가 체포
무기징역 선고.
1999년 2월 15일 김대중 정부의 사면으로 형 집행 정지로 석방
(비전향 장기수로 37년 복역)
2000년 과천 '한백의 집'에서 공동체 생활을 하다
같은 해 9월 1차 송환대상자로 분류되어 송환됨
‘3530 안영기’ 크라프트지에 붓으로 쓰여진 수형 번호와 이름

권옷헌 선생이 감옥 안의 안영기 선생에게 보낸 연하장




<기록의 발견>
평생을 ‘양심수의 대부’로 인권, 통일운동가로 생을 바쳐온 권오헌 명예회장은 기록을 매우 중시하는 분이었다. 매일의 활동을 대학노트에 꼼꼼히 적는 습관은 삶을 마감할 때까지 이어졌다. 후원회 소식지에 실을 활동일지 원고도 눈에 보이지 않아도 손감각으로 흐트러짐없이 매월 10장이 넘는 분량을 산출했다. 후원회가 만들어져가는 과정을 적은 메모들, 장기수를 포함한 양심수들과 주고받은 편지, 민중민주운동사를 가늠할 여러 자료들이 보물처럼 쏟아졌다.
이렇게 모아둔 기록물이 25년 여름 5톤트럭 2대에 실려 성북구 인수동 홍익빌라 202호에서 낙성대 만남의집으로 옮겨졌다. 이제 그 자료들을 정리하고 목록화하며 숨쉬게 만들어야 할 책임을 맡게 되었다. 아카이브 봉사자들을 모으기 시작했고 26년 3월부터 자료들의 정리를 시작했다.
2000년 송환되신 선생님들의 생활공동체였고 현재도 여전히 만남의집을 지키고 계신 비전향장기수 선생들! 그분들의 기록들도 함께 아카이빙을 하고 있다. 이 소중한 기록자산을 잘 보존하는 일이 양심수후원회의 역할이기도 하다. 과거를 만나는 일은 가슴 뛰는 일, 현재를 새롭게 해석하는 일! 그 일을 감당해 내고 있는 봉사자들의 손길에서 피어난 감동을 전하기 위해 이 ‘기록의 발견’ 코너를 새롭게 만든다.
신념으로 지킨 양심의 숨결을 기록하다
나는 양심수후원회 아카이브팀 일원으로 2월부터 일주일에 2~3번씩 기록작업에 합류하게 되었다. 제일 먼저 만난 사료가 안영기 선생이 감옥에서 출소할 때 지고 나온 망태기였다. 이 유물이 어떻게 만남의집에 남겨지게 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선생은 과천 한백의 집에 계시다가 2000년 9월 2일 북송되었다고 한다. 다만 선생들이 송환될 때 일부 자료들을 낙성대 만남의집에 맡겨두지 않았을까 조심스레 추측해볼 뿐이다.
낙성대 만남의집 안방 창고, 그 어둠 속에서 25년을 지낸 안영기 선생의 망태기가 올해 봄 세상 밖으로 나왔다. 무명천 주머니 두 개를 이어 붙여 손수 바느질해 만든 망태기 안에는 선생님의 37년간의 감옥생활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3530 안영기’ 크라프트지에 단단한 붓으로 정자체로 쓰여진 수형 번호와 이름은 선생님의 신념만큼이나 단단해보였다.
왜 그리 소중히 보관하고 계셨을까? 바깥 소식을 전해주던 유일한 것이었을 편지들은 다발들로 나눠 묶여 있었다. 봉투와 편지는 바스러질 듯 낡아서 손으로 만지기도 조심스러웠다. 선생님의 소중한 유품이 망가질까 봐 편지 봉투 하나 편지지 한 장에 미치는 손길도 숨죽여야 했다.
남동생과 누나, 여동생이 보낸 편지들로 선생님의 가족사도 엿볼 수 있었다. 오래 작업을 하다보니 마치 퍼즐이 맞추어지듯 가족관계도를 그려낼 수 있게 되었다. 막 결혼한 신혼부부 사진, 갓 태어난 조카의 백일사진, 글짓기에 재능이 있었던 여동생의 동화 당선작을 필사한 원고지 뭉치들...이렇게 동봉된 편지들이 감옥에 갇힌 선생님이 신념을 지키는 데 큰 힘이 되었을 것이다. 한 봉사자는 망태기에서 편지 뭉치가 나올 때마다 작업을 멈추고 눈물을 흘렸다.
감옥에서 받았던 재판 기록물과 결정서, 항소이유서, 종교단체와 시민단체 그리고 새내기 대학생들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선생님께 편지를 보냈다. 편지와 마음을 담아 보낸 영치금 확인증까지, 감옥에서 나올 때까지 무엇하나 소홀히 대하지 않고 작은 메모까지 소중히 보관하고 있었다.
선생은 송환된 지 9년 뒤인 2009년 사망했다고 전한다. 인연의 고리가 없었던 선생의 유품이 불시착한 비행기처럼 나에게 온 까닭은 무엇일까? 고난의 세월을 이겨낸 선생의 일상이 우리에게 남겨진 이유는 무엇일까? 선생이 지켰던 신념의 역사가 현재를 사는 우리들의 든든한 뿌리이고 미래를 가꾸는 삶의 이정표가 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오늘도 그 신념으로 선생님의 양심의 숨결을 기록하고 있다.
‘3530 안영기’ 크라프트지에 붓으로 쓰여진 수형 번호와 이름
권옷헌 선생이 감옥 안의 안영기 선생에게 보낸 연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