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활동]역사기행-제주 4·3평화기행 (11월1일-2일)

2025-11-05

역사기행-제주 4·3평화공원에서 송악산까지, 슬픔을 넘어 위로의 길을 걷다


글 _이지원 회원


올해 역사기행은 11월1일부터 2일까지 제주 4.3 평화기행으로 진행했습니다.

이번 기행은 사단법인 제주4.3기념사업위원회 평화기행위원회의 주최로 진행되었으며, 해설과 안내, 버스와 숙박을 지원받아 뜻깊고 안정적으로 일정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제주 4.3의 소중한 기록들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고, 4.3을 다룬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의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받는 등 제주 4.3을 기억하고 전하기 위한 각계의 노력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진행된 이번 평화기행은 참가자들에게 더욱 깊은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기행 동안 이상언 해설사님께서 열정적인 해설로 제주 4.3의 역사와 현장의 의미를 생생하게 전해주셨습니다. 또한 1박 2일 동안 함께해주신 이성은 선생님의 세심한 안내 덕분에 참가자들이 더 깊이 보고 배우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제주시가 지원한 숙소 ‘이을락’도 편안하고 만족스러웠습니다. 여러 도움과 배려 속에서 참가자들은 제주 4.3의 아픔과 진실, 그리고 평화의 의미를 다시 새기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번 기행을 위해 애써주신 제주4.3기념사업위원회와 평화기행위원회, 해설과 안내로 함께해주신 모든 분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사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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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태평양전쟁 당시 만든 군사기지 제주 알뜨르비행장 격납고에서 단체사진


  11월의 제주 바람은 뺨을 부드럽게 스치는 듯하면서도 묵직한 무게를 품고 있었다. 섬의 들판을 넘어오는 바람 속에는 오래된 이야기들이 소곤거리는 듯했다. 이번 여정은 단순한 여행이나 가벼운 답사가 아니었다. 제주 땅에 남겨진 슬픔의 흔적 위를 조심스레 걸으며, 잊혔던 목소리들과 마주하고 그들에게 작은 위로라도 건네고 오고 싶었던 마음의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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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평화공원 위패보관실 앞에서 묵념하고 있는 회원들


  여행의 첫 발걸음은 제주4·3평화공원이었다. 정방형의 광장과 꺼지지 않는 불꽃, 부채꼴 제단이 펼쳐진 자리에서 바람은 한결 조용히 흐르고 있었고, 위패봉안실에 빼곡하게 적힌 14,654개의 이름들, 혹은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이들의 침묵은 섬 전체가 한 사람의 거대한 마음처럼 먹먹한 응어리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이름 하나하나에 담긴 개인의 비극을 어찌 다 헤아릴 수 있을까! 그곳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가슴 한편이 서늘해졌지만, 그 감정은 차갑지 않고 오히려 뜨거웠다. ‘기억’이라는 말이 얼마나 무겁고 결연한 것인지, 그 자리에서 비로소 온몸으로 체감하였다. 봉안관에 고요하게 잠든 유해들이 전하는 것은 단순히 ‘죽음의 기록’이 아니었다. 그것은 살아있는 우리에게 ‘기억할 책임’을 다하라는 간절한 속삭임이었다. 어둠 속에서도 기억을 잃지 않으려는 인간의 의지가, 부드럽지만 단단한 힘으로 조용히 스며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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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위패보관실에서 방명록을 쓰고 있는 김영식 선생  ▲오른)제주4.3평화기념관에서 4.3사건의 도화선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는 회원들 


 이어 찾은 북촌마을은 돌담과 바람이 이어지는 평온한 풍경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그 조용한 포구의 풍경 아래에는 두 번의 비극이 그림자처럼 드리워져 있었다. 1948년 12월, 억울한 처형이 일어나고, 이듬해 1월에는 민간인 학살이 이어졌다고 한다. 그 모든 비극이 일어난 곳이 지금은 아이들이 뛰어놀 법한 학교 마당이고, 노인들이 바람을 맞으며 쉬었을 법한 돌담길이라는 사실이 더욱 마음을 저미게 하였다. 그 길을 걸으며 ‘왜 이 모든 일이 멈출 수 없었을까?’라는 질문 앞에서 우리는 오래 머물렀다. 평온한 일상의 피부 아래 숨겨진 상처들은 바람이 스칠 때마다 또렷하게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 아픔이 오늘날 우리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깊이 성찰하고, 그 상처가 완전히 아물 때까지 지속적인 관심을 두는 것 역시 우리의 책임이라는 생각을 하며 포구의 바람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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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 학살의 아픔이 깊은 북촌마을 바닷가 옛등대가 있는 언덕에서 바람을 맞으며 해설을 듣고 있는 회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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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촌마을 바닷가 포구에서 비전향장기수 양희철, 김영식 선생님



  두 번째 날, 제주시에서 서귀포 대정읍으로 이동해 도착한 일제의 야욕을 그대로 마주한 격납고터는 콘크리트 벽 틈 사이로 가늘게 스며드는 빛이 인상적인 곳이었다. 밤이면 영문도 모른 채 불려 나가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던 사람들이 지나갔을 자리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더욱 아려왔다. 이어서 발걸음은 섯알오름으로 향하였다. 예비검속으로 끌려와 이름도 묘도 없이 사라진 삶들이 묻힌 언덕…. 따뜻한 햇살 아래 부드럽게 흔들리던 억새와 달리, 바람은 유난히 낮고 가라앉은 목소리처럼 느껴졌다. 그곳은 ‘이야기되지 못한 이야기’들이 겹겹이 포개져 있는 장소였다. 설명되지 못한 죽음, 기록되지 못한 이름, 전달되지 못한 사연들 사이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단지 그 침묵 앞에 온전히 서 있는 것뿐이었다. 그저 듣고 싶다는 마음 하나만으로도 바람 속에 숨어 있던 작은 음성들이 들려오는 듯하였다. 문화해설사님의 설명 외에도 유족 양신하 어르신의 생생한 증언을 듣다 보니, 우리는 깊은 묵념으로밖에 응답할 수 없었다. 그 공간에 서면 자연스레 말이 줄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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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섯알오름 예비검속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회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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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섯알오름 예비검석 희생자 유가족 양신하 어르신의 생생한 증언을 듣고 있는 회원들


  섯알오름을 넘어 송악산까지 걸었다. 절벽 아래 부서지는 파도 소리와 해안을 따라 이어지는 산책길, 길게 흘러가는 바람이 여행의 끝을 부드럽게 감싸고 있었다. 섯알오름과 북촌에서 들었던 슬픔의 목소리들이 송악산의 바람 속에서 조금씩 풀어져 가는 듯 할때 나는 바다를 바라보며 작은 마음을 전하였다. "오래 기다리셨죠. 이제는 편히 쉬시기를." 바다는 아무 말 없이 그 마음을 품고 멀리 흘러가고 있지만 이러한 역사의 아픔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다음 세대에게 올바른 역사 인식을 심어주는 것은, 우리 기성세대의 소중한 의무이자 지혜로운 유산이 될 것이다.


  마을에서 운영하는 대정의 <와랑와랑 한식부페>에서 점심을 먹고 백조일손지지에 도착했을 때, 제주 바람은 어느 때보다 낮게 울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백 명의 조상, 하나의 아들’이라는 뜻을 지닌 이곳은 신원이 확인되지 못한 희생자들을 한데 모신 자리였다. 한 묘 안에 여러 생의 끝이 함께 누워 있다는 사실은 슬픔이 단지 개인의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것임을 일깨웠다. 묘역 앞에 서니 마치 뒤늦은 장례가 치러지고 있는 듯한 깊은 여운이 마음을 흔들었다. 삶의 끝이 너무나 캄캄하게 사라졌기에, 그들을 위해 마련된 이 밝은 묘역은 오히려 더 아리고 찬란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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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백조일손 역사관을 관람하는 회원들  ▲오른)송악산을 향해 언덕을 넘어가는 회원들



여정의 마지막은 추사 김정희의 유배지였던 추사관이었다. 4·3의 기억들로 무거웠던 마음 앞에 추사의 글씨는 조용한 위로를 건네는 듯하였다. 낙화처럼 강인한 필획, 고난의 시간을 견디며 이어온 정신, 절제된 아름다움이 공간을 가득 채우며, 김정희가 남긴 그 몇 획의 마음이, 슬픔의 길을 걸어온 우리에게 잔잔한 숨을 불어넣어 주었다. 글이 이토록 사람을 다독일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세한도’가 우리 마음을 대신하는 것 같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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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 추사관에 전시되어 있는 세한도  ▲ 오른) 추사 김정희의 유배지에서 기행에 참석한 심진경 어린이


평화공원에서 시작해 너븐숭이기념관, 북촌마을의 학교와 포구, 비설, 격납고터, 섯알오름, 송악산, 백조일손지지, 추사관까지 이어진 1박 2일의 여정은 슬픔에서 출발해 기억을 지나 위로로 도달하는 길이었다. 기억은 단지 눈물로 남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기록하고 전해야 다음 세대가 이 길을 다시 슬픔으로 걷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이 여행은 가르쳐 주었다. 돌 하나, 바람 한 줄기, 동백꽃 한 송이까지—제주의 모든 풍경이 ‘기억해달라’고 말하고 있었다. 섬을 떠나며 마지막으로 스친 바람 속에서 나는 조용히 대답하였다. "기억하겠습니다. 그리고 위로하겠습니다. 더 나아가, 이 땅에 다시는 그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도록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다하며 미래를 지켜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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