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희성선생 18일 미대사관 앞 ‘NO아메리카’ 시위
Newsroh=로창현기자 newsroh@gmail.com
세상에서 가장 슬프고 특별한 1인시위를 아시나요.
구순(九旬)이 멀지않은 고령의 노인이 아들의 환갑(還甲)을 축하하는 ‘시위’를 한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
주인공은 박희성(87) 선생이다. 오는 18일 그이는 환갑을 맞는 아들을 위해 낮 12시부터 1시간동안 광화문 미국 대사관 앞에서 피켓을 들고 침묵시위를 갖는다.
미대사관 앞에선 지난해 9월 8일부터 미국이 전 세계에서 자행한 전쟁과 반인륜 범죄, 불평등한 한미동맹을 고발하는 ‘아메리카 NO 국제평화운동(AmericaNO Int’l Peace Action)’ 1인시위가 6개월 째 진행되고 있다.
릴레이 1인 시위에 고령의 노인이 육순 아들을 위해 피켓을 들게 된 것은 무슨 연유일까. 선생은 지금도 아들 얘기가 나오면 ‘우리 애기’라고 부른다. 그이에겐 천진난만한 재롱둥이로 남아 있기때문이다. 아들 동철이 태어난지 1년4개월 됐을때 그이는 집을 나섰다. 기약없는 이별의 시작이었다.
지난 12일 설날을 맞아 찾아간 비전향장기수들의 쉼터 낙성대 만남의집은 아주 낡았다. ‘비전향장기수들을 즉각 송환하라’는 큼지막한 글이 붙어있는 계단 벽을 따라 올라가면 2층에 선생의 방이 있다. 4평 정도 되는 작은 공간에 작은 책상 하나와 벽 양쪽에 많은 책들이 꽂혀 있었다.
박희성 선생은 평안북도 박천군에서 태어나 구성군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6.25가 발발한 1950년 만 열여섯살에 자원 입대해 군공메달 등 훈장 두 개를 탔고 열여덟살에 로동당 당원으로 ‘화선 입당(火線入黨 전쟁중 입당)’을 했다. 북에서 찾아보기 힘든 특별한 이력이다.
군에서 7년을 복무한 후 고향에 돌아와 영화관 기사로 1년반 정도 일하며 아내(리정자)도 만났다. 선생의 얼굴에 잠시 미소가 번진다.
오른팔과 왼쪽 허벅지에 총 두발을 맞고 목숨을 건진 그는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후 무기로 감형돼 대전과 전주, 광주교도소로 이어지는 27년의 수형생활을 했다. 필설(筆舌)로 다할 수 없는 강제전향의 고문과 지독한 배고픔에 얼룩진 세월이었다.
88년 출소하면서 그이가 받아쥔 주민등록증엔 본적이 광주교도소 주소지로 되어 있다. 주민등록번호 뒷자리도 여느 사람들과는 다른 특별한 숫자들이다. 남쪽에 아무런 연고자가 없는 그는 교도소에서 따낸 건축도장기능사 1급 자격증을 갖고 공사판을 돌며 생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20년간 계속된 경찰의 보호관찰로 월세방에서 쫒겨나기 일쑤였다. 12년간 여관과 여인숙을 전전(展轉)하다 2007년에야 비전향장기수 쉼터인 낙성대 만남의집에 방 한칸을 얻을 수 있었다.
출소후 33년이 지난 지금까지 형극(荊棘)의 세월을 견딘 것은 반드시 고향에 돌아가 사랑하는 아내와 외아들 동철을 만나겠다는 일념때문이었다. 2000년 6.15선언에 따라 63명의 비전향장기수들은 북녘으로 돌아갔지만 그를 비롯한 강제전향 피해자 등 33명은 제외됐다.
2004년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는 강제전향을 헌법이 보장한 양심의 자유를 침해한 위법 행위로 규정했다. 통일부도 남은 이들을 2차 송환 대상으로 인정하면서 2005년 정동영 장관 시절 성사될 것이 유력해 보였다. 그러나 이들의 송환은 보수단체의 반대와 비틀거리는 남북관계로 지금까지 실현이 되지 않고 있다. 그 사이 고령의 장기수들은 하나 둘 타계했고 지금은 열한명이 남아 있다.
2000년 1차 송환대상에 포함되지 못했을 때 심정을 묻는 질문에 선생은 한숨을 내쉬며 자신보다 지난 1월 24일 89세를 일기로 타계한 박종린선생을 떠올렸다.
“내가 지금 가장 가슴 아픈게 박종린 선생님이에요. 그분은 저처럼 어린 나이에 입대해 화선입당을 했고 신혼의 아내와 백일 된 딸을 두고 남쪽에 와서 체포돼 34년을 감옥에서 살았어요. 결혼도 안하고 고향에 돌아가겠다는 일념으로 살아왔는데...돌아가신 다음에 정말 많이 울었습니다.”
선생의 서가엔 2018년 경향신문이 보도한 생존 장기수 19명의 컬러사진이 걸려 있었다. 그 사진을 가리키며 어두운 표정이 된다.
“1차 송환때 못간 분들이 33명이었어요. 2018년에 19명이 남아서 사진을 찍었는데 지금 보세요. 제일 먼저 김동수 선생님 돌아가시고 지난달 박종린선생님까지 2년사이에 여덟분이 돌아가셨어요. 이제 내가 집에 가는 날짜를 기다리는게 아니라 내가 몇 번째로 여기서 죽는가 그날짜 기다리게 됐으니 이거야 정말...너무나도 가슴 아파요.”
살짝 눈시울이 붉어졌던 선생은 하지만 이내 생기를 찾는 모습이었다.
“난 꼭 돌아갈겁니다. 내년 2022년 4월 24일이 내가 입당한지 만 70년이 되는 날이에요. 지금도 당증 번호는 안잊어버리고 있어요. 내가 여기 나올 때 당에 당증을 맡겨놓고 나왔는데 입당 70년 되기전까지 돌아가서 당증을 찾아서 가슴에 품는거 그게 소망이에요.”
평소 만남의 집에선 직접 식사준비도 한다. 상을 펴는 박희성선생. 왼쪽은 선배 양원진선생
“아들 만나면 부끄럽지 않게 살았는지 묻고파”
만남의집에서 그이는 김영식선생의 건강이 안좋아 식사 준비 등 집안일을 직접 챙긴다. 교도소에 있을때만 해도 고혈압에 심장병에 지병(持病)이 있었지만 사회에 나온뒤로 절로 없어졌다. 하지만 체포될 때 관통상을 입은 팔뚝과 허벅지가 요즘들어 자주 아파온다.
‘아메리카 NO 국제평화운동’ 1인 시위에 선생은 벌써 두차례나 참여했다. 분단의 원인도, 분단의 지속도 모두 미제국주의의 농간이라고 그이 굳게 믿고 있다. 남북 정상이 판문점과 평양에서 사실상 종전선언과 평화협정의 대원칙에 합의했지만 한걸음도 나아가지 못하는 것도 분단 고착화를 통해 막대한 이익을 누리려는 미국의 수구냉전 세력때문이라는 것이다.
선생은 자신과 가족의 생일, 명절이 괴롭다. 차라리 모르고 지내면 가족 생각이 덜 날테니 말이다. 한시도 잊어본 적 없는 어린 아들이 환갑을 맞는다는게 실감이 안난다. 집을 떠나기 전날 밤 아들은 평소와 달리 밤새 아빠 품을 파고 들었다.
“아들 꿈을 꿔도 딱 1년 4개월에 멈춰 있어요. 걸음마 걷던 아들을, 그 다음에 본적 없으니 딱 끊겨버리는거죠. 그런 아들이 환갑이 됐다니...집에 있으면 가슴만 아프지 뭐하겠어요.”
한없는 그리움을 삭히기 위해서라도, 자신과 가족, 민족의 비극을 초래한 미국의 책임을 묻는 피켓을 드는 것이 아들의 환갑일에 줄 수 있는 최선의 선물이라고 마음 먹게 되었다.
왼쪽부터 박희성선생 양원진선생 김영식선생
올 설날엔 만남의집을 찾아온 양원진(93) 선생과 안학섭(92) 선생, 유일한 홍일점이자 최고령인 변숙현(98) 선생 등 선배 장기수들과 반가운 재회를 했다.
안학섭선생과 최고령 홍일점 변숙현선생
그이는 통일부에서 처음으로 설날 축하 메시지를 받았다며 휴대폰을 보여주었다.
‘이산가족 어르신들게 새해 설날을 맞이하여 따뜻한 마음을 전합니다. 늘 건강하시고 평안하시길 기원합니다.’
두 개의 짧은 문장이지만 통일부에서 전례없이 설 인사를 보내온 것이 못내 고맙고 좋은 징조로 생각하는듯 했다.
“그래도 우리가 희망이 보이는 것은 옛날에는 매스컴이 우리들에 대해 관심이 없었거든요. 근데 이제 사방에서 (보도가) 나오잖아요.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남측 정부가) 우리들을 보내줌으로써 (꽉 막힌 남북관계의) 물꼬가 터지는 기회가 생긴다구요.”
선생의 탁상 달력엔 2월 18일 작은 글씨가 쓰여 있었다.
환갑을 맞는 아들의 생일을 표시한 것이었다.
인터뷰를 마치며 아들을 만나면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지 여쭤 보았다.
“아버지 부끄럽지 않게 잘 일했는가 물어보고 싶어요. 부끄럽지 않게 살았는가... 그렇게 살았을거라고 믿어요.”
박희성 선생이 탁상달력에 표시한 아들의 생일(2.18)을 가리키고 있다
글로벌웹진 NEWSROH www.newsroh.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