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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의자 신문의 비밀

 

장경욱

 

 

( *책 인용 구절)

__<허위 자백과 오판>에서

 

피의자는 수사기관이 부르면 가야 한다. 안 가면 십중팔구 체포된다. 수사기관에 불려 가면 피의자 신문 과정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까. 대부분의 시민들은 잘 모른다. 별로 관심이 없다. 자기는 평생 죄지을 일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제 좀 알아두자. 왜냐하면 시국이 하 수상해서 시민의 자유가 억압받고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되어 누구나 죄지을 각오로 저항할 날이 다가올지 모른다. 알아두어서 손해 볼 것 없다. 유비무환 아닌가.

일반 시민들에게 피의자 신문 과정이라 하면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는 것이 전부일 것이다. 조사실에서 벌어지는 신문 장면을 많이 보아두면 행여 경찰에 불려갔을 때 도움이 될까. 아무 소용이 없다. 피의자 신문의 전후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촬영해 리얼 다큐멘터리로 보여주면 모를까. 그런 영상은 처음부터 제작이 불가능하니 볼 수가 없다.

법에는 피의자 신문 과정을 영상 녹화할 수 있게 되어 있다. 그런데 일반 시민들은 신문 과정을 녹화한 영상물을 볼 수 없다. 법정에서도 제한적인 경우에 한해 재생된다. 일반 시민들은 피의자 신문 과정을 견학할 수 없으므로 그 과정을 보고 싶은 호기심을 충족할 길이 없다. 직접 피의자로 불려 가보면 안다. 그때는 너무 늦다. 왜냐하면 수사관에 농락당하기 일쑤니까. 어르고 달래는 수사관 앞에서 겁먹고, 자존심 구겨지고, 비굴해진다. 다시 불려갈까 봐 쳐다보기도 싫어진다. 다시 나오라고 하면 내내 밥맛이 떨어지고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일반 시민들에게 피의자 신문 과정은 요술 방망이나 같을 것이다. 수사기관에 피의자 신문을 받기 위해 출두하는 피의자의 모습은 당당하다. 언론의 카메라와 마이크 앞에 서서 분명한 목소리로 혐의를 부인한다. 그런데 조사를 마치고 나올 때의 모습은 전혀 다르다. 구속의 몸이 되어 고개를 숙인 채 카메라를 회피하면서 구치소로 향하는 처량한 신세로 변해 있다. 대체 조사 과정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기에 저렇게 달라질까. 이것이 시민들의 마음속에 익숙하게 각인된 피의자 신문 과정에 대한 인상이다. 직접 불려 가면 자신도 그렇게 될까 봐 겁부터 난다. ‘그곳에 불려 가는 일이 없어야지하고 마음을 다지는 게 상책 같다.

피의자 신문 과정의 생생한 현장을 글로나마 써보기로 한 것은 일단 일반 시민들이 수사기관에 불려 가거나 잡혀갔을 때 자존심을 농락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직접적인 계기는 <허위 자백과 오판>(리처드 A. 레오, 후마니타스, 2014)을 읽고 프레시안에 서평을 싣게 되면서다. 미국의 피의자 신문의 수사 기법을 다룬 책인데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점이 많았다. 그 책을 읽고 시민들을 위해 우리나라의 피의자 신문 과정에 대해 최대한 생생히 알려야겠다고 결심하게 되었다.

 

변호사로서 주로 하는 일이 피의자 신문 과정에 참여하는 것이다. 10여 년 동안 변호인으로 그 과정에 참여하면서 이것저것 경험하지 않은 게 없다 싶다. 피의자에게 진술거부권을 조언했다가 조사실에서 쫓겨나기까지 했으니까. 그때 쫓겨난 일을 두고 피의자에게 보장되어야 할 변호인 조력권을 침해받았다는 이유로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해서 승소했다. 그렇게 형사 사법 발전에 기여한 소송이었지만 아직도 수사기관은 잘못을 인정하지도 반성하지 않고 있다.

피의자 신문 전후 과정에서 변호인으로서 피의자를 위해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노하우가 많이 쌓였다. 수사관들이 사용하는 신문 기법도 잘 알게 되었다. 거기에 피의자가 당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노력해왔다. 하지만 여전히 수사관 중에는 자신들의 수사 기법이 들통 나면 변호인이 수사를 방해했다며 시비를 걸어오는 경우가 있다.

사실 변호인으로서 조력하는 내용이라고 별게 없다. 미란다 권리를 행사하도록 권한다. 피의자에게 최선의 이익은 미란다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라고 깨닫게 해준다. 헌법에 명시된 권리를 행사하라고 한다. 헌법을 고치지 않는 한 수사관이 피의자의 진술거부권 행사를 수사 방해라고 시비를 걸어봤자 통할 턱이 없다.

나의 결론을 정리하면 이렇다. 현재의 피의자 신문 과정은 수사관이 여러 수사 기법을 활용해 피의자의 심리를 조종함으로써 유죄 자백을 만들어내는 과정이라는 것이고, 미란다 권리를 전면적으로 행사하는 것이 피의자가 선택할 합리적 대응이라는 것이다.

이제부터 피의자 신문 과정에서 벌어지는 일들의 전후 과정을 시간순으로 이야기하려 한다. 내가 피의자 신문에 변호인으로 참여하는 과정에서 경험한 일들을 예로 들 것이다. 우선 수사기관에서 피의자로 출석하라는 전화나 서면을 받았을 때 벌어지는 일, 그리고 수사기관의 조사 장소와 출입 절차를 살펴본 다음, 피의자가 조사실에 들어간 이후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설명할 것이다. 그러면서 피의자 신문이 개시되는 과정에서 미란다 권리를 적극 행사해야 하는 이유, 수사관들의 심리 조종 기법에 대한 설명을 계속 덧붙일 것이다. 말 섞기, 길들이기, 통제하기, 속이기, 회유하기, 모욕하기, 위협하기, 변호인과의 사이를 이간질하기 등. 여기에 수사관과 같이 담배 피우지 않고, 잡담하거나 악수하지 않고, 조사실에서 일체 침묵하면서 눈감고 명상하고, 수시로 스트레칭하고, 구속 피의자의 경우 연일 출정에 저항하고, 불구속 피의자의 경우 조사를 중단시키고 조사실에서 나가는 식으로 대응해야 한다. 무엇보다, 변호인과 함께 미란다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 것을 여러 사례를 통해 서술할 것이다.

피의자로 출석 요구를 받으면

 

수사기관에서 피의자로 소환하는 출석 요구가 왔다. 보통 서면이나 전화로 온다. 어떡해야 할까. 전화상에서 구두로 출석 요구가 왔을 경우 긴말 섞지 말고 수사관의 신분을 확인한 다음 서면으로 출석요구서를 보내라고 하고 전화를 끊는 게 좋다. 곧바로 변호사를 선임해 변호사에게 수사기관과 출석 일시를 협의해 조정하도록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 그런데 피의자 신문 과정에 참여할 변호사를 선임할 돈이 없다면? 변호인을 만나 상담이라도 받고 난 후 수사기관과 출석 일시를 정하는 것이 좋다.

전화를 받고 그 자리에서 바로 수동적으로, 수사기관이 일방적으로 지정하는 일시에 출석하겠다고 말하는 것은 되도록 피하자. 여러분은 수사관이 부르면 부르는 대로 나가는 그런 궁박한 처지가 아니다. 수사관과 대등한 입장에서 능동적으로 대처해도 늦지 않다. 자신의 일정을 살펴보고 피의자로서 방어권 행사를 준비할 시간을 가늠해서 출석 일시를 조정하는 역량을 보여주자.

출석 요구를 받고 나서 생기는 궁금증에 수사기관의 의중을 탐색할 요량으로 혼자 수사관과 대화를 했다가는 미란다 권리를 행사할 여지가 없어진다. 수사관은 피의자와 대수롭지 않게 대화를 하는 척한다. 그때는 미란다 권리를 아직 고지도 하지 않은 상태이다. 물론 변호인도 아직 선임되지 않았다. 피의자는 출석도 하기 전에 수많은 불리한 정보를 부지불식간에 수사관에 바치고 만다. 그런 정보들은 수사관이 미란다 권리를 고지하고 나서 피의자 신문 과정에서 그 권리를 포기하게 유도하면서 갖은 수사 기법을 써가며 끌어내야 할 것이다.

출석요구서를 받고 보니 출석하라는 날짜가 바로 다음날이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다음날 아무런 일정도 없으면 그냥 나가야 할까. 그럴 수도 있다. 그보다는 우선 전화로 항의해야 한다. 그런데 이게 쉽지 않다. 내일 출석하지 않으면 출석 불응으로 간주하겠다는 수사관의 한마디에 덜컥 겁부터 난다. 어찌 할 도리가 없다. 그처럼 갑질 관행에 익숙한 수사기관과 출석 일시를 협의하고 조정하기는 매우 힘들고 어렵다. 출석 불응으로 간주한다는 것은 체포하겠다는 말 아닌가. 이 지점에서 변호인의 도움이 필수적이다.

변호인으로 선임되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수사기관에 피의자의 출석요구서를 변호인의 사무실로 보내줄 것과 출석 일시 협의를 반드시 자기와 하도록 요청하는 것이다. 출석요구서에 적힌 출석 일시가 상당한 시간적 여유가 없는 날짜인 경우 내용증명을 띄운다. 피의자의 생업과 변호인 조력권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출석 일시는 심리적 불안을 일으키는 위압적강압적 방식의 위법한 수사 행태라고 강력히 항의한다.

내용증명을 띄웠는데도 출석 일시를 조정하기는커녕 여전히 안 나오면 출석 불응으로 간주운운하는 수사관이 종종 있다. 갑질이다. 그럴수록 수사관에게 겁먹어 끌려 다녀서는 안 된다. 변호인과 함께 싸워야 한다. 갑질을 부리는 통화 내용을 녹취해서 증거로 남기고, 경찰의 청문감사관실에 진정을 넣고, 직권 남용 혐의로 고소할 준비를 해야 한다. 여태껏 출석 요구를 받은 이가 일방적으로 정한 날짜에 출석하지 않았다고 해서 출석 불응으로 간주된 적은 한 번도 없다. 결국 수사기관은 출석 일시를 우리의 일정에 맞추어 조정하게 되어 있다.

변호인과 출석 일시를 협의해달라는 요청에 응하지 않는 수사관도 있다. 그래 놓고 피의자가 그사이에 특정 날짜에 출석하기로 동의했으니 그날 출석하지 않으면 출석 불응으로 간주하겠다고 위협한다. 수사관이 변호인을 상대하지 않고 피의자와 출석 일시를 협의하려는 데는 속셈이 있다. 피의자를 직접 상대하면 십중팔구 자신의 요구에 말려들기 쉬울 테니까. 수사관은 피의자와 출석 일시를 협의하면서 교묘하게 위협적 언사를 써가며 반강제적으로 동의를 받아낸다. 그런 다음 변호인의 일정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변호인이 참여하지 않는 상태에서 피의자 신문을 강행하겠다는 태도를 보인다. 어떻게든, 피의자를 신문할 때는 변호인의 참여를 보장해야 한다는 미란다 권리를 부인하려는 의도이다.

피의자는 변호인과 상의하지 않고 동의한 것을 자책하며 어쩔 수 없이 혼자라도 나가서 피의자 신문을 받겠다고 한다. 제정신이 아니다. 속으로는 변호인 측에서 다른 일정을 조정해 그날 함께 출석해주기를 바라며 섭섭해할지 모른다. 이런 우여곡절 속에서 피의자와 변호인 사이에 틈이 벌어질 위기가 생긴다. 수사관의 이간질에 속상하다. 다시 수사기관에 내용증명을 띄운다. 미란다 권리를 정면으로 부인하는 위법한 짓이라고 항의한다. 증거도 되고 강력한 경고도 된다. 한편으로 피의자에게 미란다 권리의 중요성을 다시 알리고 함께 싸우자고 설득한다. 이러한 노력으로 시민의 권리는 신장되고 수사기관의 갑질 관행은 조금씩 시정되고 있다.

때로 검사가 독촉한다며 수사 지휘를 핑계 대면서 불구속 피의자를 매일 불러 조사하겠다고 통보하는 수사관도 보았다. 고압적인 자세로 통보하는 모습은 범죄 행위에 가깝다. 정신 나가지 않고서 어떻게 그렇게 당당할 수 있을까. 매일 불러 조지겠다는 것인데 핑계가 좋다. 고압적 자세로 매일 출석 조사를 통보하는 수사관의 모습에 변호인 옆에서 듣고 있는 피의자는 심리적으로 매우 불안해하며 스트레스를 받는다. 수사관은 구속, 불구속 의견을 달아 빨리 올리라는 검사의 엄명이 떨어진 듯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며 위협적 언사를 늘어놓는다. 방법이 따로 없다. 이런 저질 수사를 당하면 변호인으로서 품위를 잃고 흥분할 수밖에 없다. 누가 보더라도 수긍이 가는 상식 수준의 싸움을 한바탕한다.

싸움에서 이기는 쪽이 누구일지는 여러분이 판단하라. 뻔하지 않는가, 정의와 상식이 승리하는 것은. 이러저러한 이유로 수사기관에서 한바탕 싸움을 하는 현장에서 옆에서 지켜보던 피의자가 쪼는 경우를 가끔 봤다. 시민을 위해 신명을 다하는 변호인이 한바탕 싸우는데 쫄 이유가 없다. 통쾌한 마음으로 변호인을 응원하고 수사기관의 불법적 수사 관행을 낱낱이 고발하는 증인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크다.

피의자의 심리를 조종하는 심리적 신문 기법

 

필자는 피의자 신문 전후로 절대로 수사관과는 아무것도 섞지 말라고 조언한다. 출석 일시와 관련한 통화조차 수사관과 직접 하지 말고 변호인과 하도록 요청한다. 수사관과 접촉하지 않도록 엄격히 조언한다. 또 조사실에서는 변호인과 귓속말을 하거나 따로 비밀 대화를 하는 것 이외에 수사관과 악수와 대화 등 일체의 접촉을 하지 말라고 한다.

필자가 경험한 바에 따르면 피의자가 수사관과 직접 접촉하게 되면 상황이 많이 달라진다. 수사관과 피의자가 출석 요구와 관련한 통화나 압수수색 현장 등 공식적인 피의자 신문에 들어가기에 앞서 가족과 날씨, 건강 등 여러 주제에 대해 아무런 생각 없이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는 경우를 많이 본다. 피의자 신문 중간중간 휴식시간에도 담배를 나눠 피며 서로 우의를 돈독히 나눈다. 같은 학교 출신이네, 동향이네 하며 말을 나누다 보면, 피의자는 어느새 수사관의 질문에 비위를 맞추어 진술을 해줘야 할 것 같은 양심의 가책을 받는다. 오히려 말조차 섞지 말라는 변호인을 보며 그렇게까지 야박하게 굴 필요가 있을까 싶다. 자신이 오히려 불리해지지 않을까 걱정하며 변호인을 타박하기도 한다. 마치 인질이 범인에게 동조하고 감화되는 비이성적 심리 현상을 일컫는 스톡홀름 증후군과 유사한 상황이 벌어진다. 이러한 일이 피의자로 전락한 시민에게 일상적으로 벌어진다.

수사관들이 신문 전후 과정에서 피의자와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 광범위한 잡담을 나누는 데는 숨은 목적이 있다. 경찰-피의자의 상호 작용을 사적인 것으로 형성함으로써 피의자가 순응해야 한다는 기대를 만들어낸다. 수사관이 자신을 거리낌 없이 드러내는 방식으로 피의자에게 우호적인 인상을 우선 심어주는 것이다. 피의자와 신문하는 수사관의 관계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현실을 만들어내고, 이를 수사관은 심리를 조종하고 속임수를 먹혀들게 할 징검다리로 삼는다. 친밀한 관계가 형성되었다 싶으면 피의자의 상황을 동정하는 척한다. 수사관은 형사 사법절차에서 피의자의 동지이자 지원자이며, 피의자의 이익을 향상시키는 존재이므로 상호 협력하는 관계를 맺고 있다는 환상을 만들어내려 애쓴다.

그런 가운데 피의자가 완전한 자백은 하지 않더라도 경찰에게 협조하는 시나리오에 동의하는 것이 도덕적 속죄나 사회적 승인으로 비치게끔 한다. 이때 제도적 혜택이나 좀 더 관대한 처분을 받을 수 있다고 피의자를 설득한다. 결국 자백하는 것이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합리적 판단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한다. 이렇게 수사관이 피의자를 설득하는 능력 뒤에는 인상 관리 전략과 기술이 자리한다.

 

처음부터 피의자로 소환해야 할 사람을 참고인인 것처럼 속여 출석하게 하는 경우도 있다. 참고인 신분이니 별일 없겠거니 여겨 변호인을 대동하지 않고 출석했다가는 낭패 보기 십상이다. 기망에 의한, 즉 속임수를 쓴 출석 요구이다.

참고인과 피의자는 형사소송법상 그 법률적 지위와 처우가 다르다. 수사기관이 그것을 모를 리 없다. 그런데 참고인으로 불러 진술 조서를 받고 나더니 바로 피의자로 입건하겠다고 나온다. 머릿속이 하얘진다. 한순간에 참고인을 피의자로 바꿔 피의자 신문을 진행할 경우 피의자는 속수무책이다. 아무런 방어 준비도 하지 않고 참고인으로 불려갔다가 뒤통수를 맞은 격이다. 이때 수사관 앞에서 미란다 권리를 행사하겠다고 말할 피의자가 몇이나 있겠는가. 그 자리에서 변호인의 도움을 받고 미란다 권리를 행사하겠다며 피의자 신문을 중지시키고 조사실에서 뛰쳐나올 수 있는 피의자가 있겠는가.

신분이 피의자로 바뀌었다면 바로 변호사를 선임하거나 미란다 권리를 주장해야 한다. 변호인의 참여를 원할 경우 변호인 없이는 피의자 신문을 받지 않을 권리가 보장된다. 미란다 권리의 중요한 내용이다. 따라서 선임한 변호인이 참여한 상태에서 신문에 받을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며 신문을 중지시키고 귀가하면 된다. 그런데 그런 권리가 있는 줄도 모르고 겁먹은 채 수사관이 이끄는 대로 끌려 다니는 신세로 전락하는 시민이 부지기수다. ‘변호인이 참여하지 않는 상태에서 조사받겠습니까라는 질문에 ’, ‘진술거부권을 행사하겠습니까라는 질문에 아니요라고 자필로 쓰고 만다. 일반 시민들에겐 어처구니없는 일로 보이겠지만, 참고인으로 수사기관에 출석했다가 흔히 벌어지는 일이다. 여러분이 당사자라면 어떻게 대응했을까?

이제 한 시민의 사례에서 우리가 얻어야 할 교훈이 무엇인지 고민해보자. 어느 날 국정원 조사관이 그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국가보안법 사건의 참고인으로 잠깐 조사할 일이 있다고 그를 불렀다. 국정원 조사관과 통화를 할 때마다 그의 음성은 도무지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고 계속 떨렸다. 국정원에 참고인으로 불려가서는 오후 3시부터 밤 11시까지 장시간 조사를 받았다. 저녁 식사도 국정원 식당에서 조사관들과 함께 먹었다.

조사를 마치고 나와서도 국정원에서 다시 부르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 밤낮으로 시달렸다. 아니나 다를까 2주일 후 국정원 조사관은 그를 다시 참고인으로 불렀다. 그때 그의 심정은 국정원 건물만 보아도 까무러칠 것 같았고 공포에 잠이 오지 않았다. 가장인 그가 국정원에 다시 불려가 조사를 받을 고민에 식사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가운데 가족 모두 하루하루 사는 게 피가 마르는 듯한 불안과 고통의 연속이었다. 그제야 그는 변호인을 선임하고 출석 일시 협의 등 모든 것을 변호인에게 위임했다. 변호인은 그에게 용기를 내어 국정원 조사관과 당당히 대화하라고 조언했다. 그는 바로 국정원 조사관에게 전화를 걸어 변호인을 선임한 사실을 알리고 앞으로는 모든 것을 변호인과 상의해달라고 했다. 변호인도 국정원 직원에게 이후 출석 일시 협의는 자신과 하도록 요청했다.

그러나 국정원 조사관은 변호인과 나누던 출석 일시 협의와 별도로 따로 그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그에게 국정원 건물이 아니라 그의 직장 근처, 그가 정하는 편한 장소에서 조사를 하겠다고 제안했다. 조사관은 이번 조사를 마치면 다시는 추가 조사를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며 변호인 없이 잠깐 보자고 혼자 조사에 응하라고 설득했다.

그는 결국 변호인에게 알리지 않고 직장 근처 한식당에서 국정원 조사관을 만나 보쌈을 시켜 앞에 놓고 조사를 받았다. ‘한식당 보쌈 조서가 만들어지는 순간이다. 그날 조사를 마친 후 그는 변호인을 만났다. 너무나 부끄러웠다. 그는 변호인에게 그동안 힘들었던 사정을 털어놓았다. 국정원의 참고인 조사가 너무나 두려운 나머지 변호인에게 알리지 않고 자존심을 구겼다는 후회가 밀려왔다. 자존심을 지키지 못했다면서 눈물을 흘렸다. 인간성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느낌에 양심을 회복하고 싶었다. 다시는 비굴하지 않고 당당해지고 싶었다. 그후 그는 증인으로 법정에 섰다. 전날의 비굴한 모습이 아니었다. 그는 한식당 보쌈 조서가 어떻게 나왔는지 설명하면서 국정원의 저질 수사를 폭로했다. 그는 용기를 냈고 자존심과 양심을 회복했다.

피의자는 그렇게 길들여진다

 

피의자는 범죄 혐의자다. 수사 대상이다. 피의자 신문은 범죄 혐의에 대해 추궁해 진술을 듣는 절차이다. 누구나 수사기관에 피의자 신분으로 출석해 피의자 신문이라는 조사를 받게 되면 겁이 난다. 한마디로 쫄게 마련이다. 안 쫀다고 하는 사람은 다 거짓말이다. 안 쫄면 수사관이 쫄게 만든다.

왜 쫄게 될까? 수사기관에서 피의자로 부르면 자기 마음대로 안 갈 수 없으니까. 체포되어 구속될 것을 각오하면 안 갈 수도 있겠지만. 몸이 아파 병원에라도 입원해 있으면 모를까 수사기관은 꼭 출석시켜 조사한다. 가끔 전직 대통령의 경우 집으로 찾아가 조사하거나 서면으로 조사하는 경우가 있지만, 그런 특혜를 바랄 수는 없다. 불려 나가기 전부터 뭔가 심신이 답답해진다.

내 집 같은 분위기의 피의자 조사실, 그런 피의자 신문은 없다. 수사관이 손님이고 피의자가 주인장이 되어 집처럼 편한 분위기에서 조사하면 얼마나 좋을까. 홈 코트의 이점이라는 게 있지 않는가. 내 집 같은 분위기에서 조사하면 누구도 쫄지 않을 것이다. 수사기관에 출석해 조사를 받더라도 탁 트인 곳에서, 여러 민원인이 오가며 볼 수 있는 곳에서 하면 훨씬 긴장감이 덜할 텐데.

수사관은 외부와 격리된 느낌을 주는 곳으로 이끎으로써 피의자에게 고립무원의 처지로 내몰렸다는 인상을 심어준다. 수사관을 따라 그런 곳으로 안내되는 순간, 피의자는 겁부터 나기 시작한다. 그렇게 쪼는 순간 아이큐가 떨어지고 자율신경계가 작동하지 않는 미지의 세계로 빠져들게 된다.

누구도 들여다 볼 수 없는, 아무도 도와줄 수 없는 그곳의 제왕은 수사관이다. 수사관에게 잘 보여야 살아나갈 수 있을 것 같은 무기력하고 수동적 처지로 전락한다. 그곳에 들어가면 수사관의 허락이 없는 한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는 것처럼 착각하게 된다. 조사 중에는 다른 약속이 있어도 바로 일어나 나갈 수 없는 것 같다. 너무나 중요한 약속이 있어 조사를 중단시키고 조사실에서 나가려 했다가는 괘씸죄에 걸려 독박을 쓰게 되지 않을까. 눈치를 본다. 수사관에게 조사를 중단해달라고 애원하게 된다.

피의자는 형사 절차의 주체로서 수사기관과 대등한 당사자이고 무죄 추정을 받는 존엄한 인격체라는 권리 의식은 가뭇없이 사라진다. 수사관과 마주 앉은 그곳에서 감히 피의자로서 당연히 누릴 수 있는 권리를 행사하겠다는 용기가 나지 않는다. 뭐가 뭔지도 모르는 수동적 처지가 되어 수사관이 시키는 대로, 유도하는 대로 따르는 신세가 된다. 화장실에 가고, 휴식을 취하고, 담배 피우는 것도 내 마음대로 못하고 수사관의 허락이 있어야 할 수 있다는 착각이 들며 바보 천치가 된다.

피의자 신문 과정에 들어가면 피의자는 일방적으로 의심받고 추궁당하는 신세가 된다. 권력 관계가 형성된다. 항상 이다. ‘의 지배를 받게 된다. 피의자 은 수사관의 질에 어쩔 수 없이 당하기 일쑤다. 강압과 회유를 반복하는, ‘조였다 풀었다하는 수사관의 갑질에 평정심을 잃은 채 편하지가 않다. 일거수일투족 모든 것을 통제받는 듯한 시스템에 빠져든다. 벗어나려고 해도 벗어날 수가 없다. 그 자리에 꿔다놓은 보리자루처럼 앉아 지루한 추궁에 어찌할 도리가 없다.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리고 싶다. 그럴 때마다 내 마음대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이 갈수록 심해진다. 아무도 나를 이해해주지 않는다. 옆에 아무도 없다. 의심을 더하며 추궁하는 눈과 목소리가 무서워진다. 계속 불안하다. 그 자리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다.

그때 수사관이 해답을 넌지시 던진다. 별것 아니란다. 서로 눈을 부라리며 대들고 힘들게 하지 말고 사이좋게 넘어가자고 한다. 갑질 하던 수사관이 애원하며 도와달란다. 그 동정의 눈빛에 마음이 동해 고마워서 뭔가 도와줘야 할 것 같은 묘한 기분이 든다. 그래 별것 아니라는데 인정해줘버리지, . 그렇게 유혹에 넘어가기 시작한다. 길들여지는 순간이다.

왜 그렇게 되고 말까? 잘 몰라서 그렇게 된 거다. 피의자 옆에서 아무도 도와주며 견제하지 않았으니까. 이런 물음이 생길 만하다. 그럼, 신문이 끝나지 않았는데 피의자가 도중에 마음대로 조사를 중단시키고 나와도 될까? 그렇다. 불구속 피의자라면 자기 마음대로 퇴거해도 상관없다. 일체의 진술을 거부하는 구속 피의자의 경우에는 조사 중단을 요청하고 자신을 유치장이나 구치소로 보내줄 것을 요청할 권리가 있다. 피의자는 조사 중에 마음대로 화장실을 가고 휴식을 취해도 된다. 담배 피고 싶으면 피러 나가면 된다. 일체의 진술을 거부하겠다는 피의자를 상대로 계속 신문을 하며 진술을 강요하는 수사관의 행태에 맞서, 포괄적 진술 거부 의사를 밝히고 조사실에서 나가도 된다. 된다니까요!

왜 아직도 이런 바보 같은 질문과 답을 계속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우리 현실에서 이런 문답을 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이는 지난날 불법적으로 행해진 임의동행의 잔재이다. 요즘은 가당치 않은 일이 되었지만, 지난 수십 년 동안 임의동행으로 수많은 시민들을 불법 체포하고 연행해 감금한 상태에서 피의자 신문을 하는 관행이 우리 사법 절차에서 어떠한 견제도 없이 버젓이 행해졌었다. 그래 놓고 수사기관은 피의자 스스로 수사관의 요청에 자발적으로 응했다는 식으로 나왔다. 피의자가 수사기관에서 언제든지 자유롭게 나갈 수 있는 것을 알면서도 숙식까지 하며 밖으로 나가지 않고 갇혀 지내면서까지 조사에 자발적으로 응했다는 것이다. 지금은 도무지 이해하려고 해도 이해할 수 없는 비정상적인 일이지만, 지난날 다반사로 일어났고 1990년대까지 이어져온 역사적 사실이다.

수사기관에 오전 일찍 출석해 하루 종일 장시간 조사를 받고 다음날 새벽이 되어 나오는 피의자를 볼 때면 참 답답하다.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 착해도 너무 착하다. 수사에 협조하는 모습을 보여야 선처를 받을 수 있다고 믿는다. 권리 행사를 주저한다. 수사에 협조하는 것이 자신에게 유리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한번 출석한 김에 피의자 신문을 모두 끝내고 마무리하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겁 많고 소심한 나머지 무기력하게 수사기관의 반인권적 수사 관행에 넋을 놓고 진이 빠지는 줄도 모르고 당하기만 한다.

공간: 수사기관의 조사 장소와 출입 절차

 

이 세상에 피의자나 참고인 신분으로 조사를 받기 위해 건물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두려움을 느끼는 그런 시설이 있을까. 있다. 그곳에서 조사를 받는 피조사인은 물론 바깥에서 오가는 시민들에게조차 그곳이 뭐하는 곳인지 알게 되는 순간부터 위협적인 조사 시설로 다가오는 곳이 우리나라에 몇 군데 있다. 대성공사, 중앙합동신문센터(북한이탈주민보호센터), 국가정보원 조사동, 경찰청 보안분실(구 치안본부 대공분실) 등이다.

중앙합동신문센터는 위치를 알기도 힘들다. 탈북자들이 한국에 오자마자 간첩 혐의에 대해 사실상 피의자신문 조사를 받는 곳인데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탈북자들은 외부에 발설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썼다며 그곳의 위치를 알려주려고 하지 않는다. 서울시 공무원 간첩 조작 사건을 계기로 그곳을 물어물어 수소문한 끝에 사흘이 걸려 겨우 알아냈다. 알려주던 사람은 누가 들을까 봐 귓속말로 조심스레 말하며 자기가 알려주었다는 사실을 비밀로 해달라고 했다.

위치를 알고 나니 그곳에 변호인 접견을 가는 것조차 너무 무서웠다. 그렇지만 특수 독방과 조사실에 갇혀 6개월 가까이 오빠와 자신의 간첩 혐의에 대해 조사를 받은 여동생 유가려 씨를 만나달라는 오빠 유우성 씨의 부탁을 뿌리칠 수 없었다. 당시 인권 옹호를 사명으로 하는 변호인의 임무를 되새겨보았지만 막상 변호인 접견을 시도하려니 떨리는 마음이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처음 가보는 곳이고 겁도 나고 해서 여럿이 함께 변호인 접견을 갔다. 높은 담과 철조망 그리고 선글라스를 쓰고 허리띠에 총기류를 차고 있는 제복을 입은 이들을 보면서 간담이 서늘해지던 기억이 난다.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받는 피의자나 참고인이 조사를 받는 국가정보원과 경찰청 보안분실 또한 시설을 찾아가 조사실로 들어서는 순간부터 불안과 위압감이 엄습해온다. 오죽하면 피의자가 아니라 참고인으로 조사를 받으러 가는데도 겁부터 나고 그곳에 다시 가기 두려울 정도가 될까. 비명 소리 가득하던 지난날 중앙정보부 지하의 고문 수사실이 떠오르고 박종철 열사가 물고문을 당한 남영동 대공분실의 기억이 스친다.

국정원에 출입할 때는 휴대전화를 갖고 들어갈 수 없다. 바깥에 있는 그 누구와도 연락이 닿지 않을 것 같은 두려움이 생긴다. 출입구에서부터 보안 시설이라며 그곳에서 보고 들은 사항을 외부에 일체 누설하지 않을 것을 서약하는 각서를 작성하라고 강요한다. 출입 절차부터 신경전이 벌어진다. 대통령도 각서를 쓰고야 출입한다는 말에, 그리고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하기 어렵다는 핑계에 각서를 쓰고 말았다. 나중에 각서를 쓰지 않고 출입했다는 변호사가 있었다는 소식을 듣고 참으로 부끄러웠다. 앞으로 다시는 각서를 쓰지 않을 것이다. 만약 각서를 써야 출입할 수 있다고 막으면 반드시 그 법적 책임을 물을 작정이다.

국정원 출입문에서 조사실이 있는 조사동까지 가는 것도 신경전의 연속이다. 국정원이 제공하는 차량의 운전석과 뒷좌석 사이, 뒷좌석 창문 모두 밖을 볼 수 없도록 차단한 상태로 이동한다. 심지어 출입문에서 조사동까지 피의자와 변호인을 각각 다른 차량에 태워 이동시킨다. 피의자 입장에서는 변호사와 함께 동승하지 못하도록 강요하는 수사관들을 보면 심장이 마구 뛰기 시작한다. 피의자에게 불안감을 야기하고 조장하는 수사관의 간계를 꿰뚫어 보고 맞서 싸워야 한다. 조사동까지 이동하는 과정에서 피의자와 변호인의 차량 동승을 막은 것에 대해 준항고(법관이 행한 재판이나 검찰과 사법경찰관이 행한 일정한 처분에 불복해 법원에 취소나 변경을 요구하는 청구)를 제기해 다투기도 했다. 그때 법정에 제출한 국정원의 대답이 걸작이다. 변호인을 예우하는 차원에서 피의자가 타고 가는 차량보다 더 좋은 차량을 준비해 따로 모신 것이란다.

국정원 조사동에 도착해서 차량에서 내려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복도의 불빛이 너무 어둡다. 전기를 아끼는 것도 좋지만 환하게 밝혀두면 어때서 그 따위 수법을 쓰는지 모르겠다. 옛날처럼 옆방에서 비명 소리가 들리지 않아 많이 좋아졌다고 해야 할까.

경찰청 보안분실은 어떠한가. 그곳에는 따로 간판이 없다. ‘보안은 음지나 으슥한 곳을 좋아하는 게 분명하다. 무언가 비밀스럽고 폐쇄적인 이미지를 연출하기 위해 무던히 노력하는 곳이 분명하다. 시내에 버젓이 있는 시설을 왜 비밀스럽게 간판도 달지 않고 위장하는가 말이다. 음침한 느낌이 절로 든다. 외부의 눈길이 닿지 않고 외부와 철저히 단절된 격리된 밀실에 들어서는 느낌이다. 누가 봐도 그곳에 들어서는 피의자에게 겁을 주기 위한 의도임을 알 수 있다.

몇 년 전만 해도 보안분실의 출입문 초인종을 누르면 사복 입은 젊은 전투경찰이 나타났다. 전투경찰이 폐지된 요즘은 보안분실 경비를 개에게 맡겼나 보다. 경비를 절감하는 차원이라는데. 사나운 개가 위협적으로 짖는 보안분실을 경험했다. 피의자 신문을 받기 위해 보안분실 초인종을 누르기 무섭게 사나운 개가 달려들며 짖는다. ‘보수대 개××’, 입에서 욕이 터져 나온다. 수사관들은 개가 무서워 움찔하는 우리의 모습을 어디선가 지켜보고 있으리라. 자존심이 팍 상한다. 피의자와 변호인을 위협하는 사나운 개를 단속해달라고 항의했다. 갈 때마다 개가 짖었다. 움찔하지 않으려 해도 개를 피해 보안분실 마당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경찰청 청문관에게 이를 시정해달라고 민원을 제기했다. 경찰청 청문관도 그곳 보안분실에 다녀오고 나서 하는 말이, 그곳 개가 무섭더란다. 보안수사대 수사관이 그깟 개가 뭐가 무섭습니까라고 하면 이제는 바로 쏘아 붙인다. 당신 가족을 데려와 초인종 눌러보게 하고 나서 이곳이 자신이 근무하는 직장이라고 얘기해보라고. 그 말에 아무 소리 못 한다.

시국 사건에서는 피의자 신문을 받기 위해 조사실에 들어가기 전부터 이러한 치졸한 저질 계략에 맞서 노심초사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변호인의 촉이 좋아야 한다. 피의자를 얼게 하는 수사관들의 다양한 수사 기법이 현실에서 활용되고 있기에 그들의 계략을 꿰뚫어 보고 맞서야 한다.

미란다 경고(원칙)는 누가, 언제, 누구에게, 어떤 내용을 고지하는 것인가?

 

수사기관의 조사실에 들어가 피의자 신문을 받게 되는 과정은 어떻게 진행될까. 조사실 안에서 피의자 신문 과정은 인정신문, 진술거부권 고지, 신문의 단계로 진행된다. 그 과정에서 조서가 작성된다. 피의자는 신문 과정에서 어떻게 당당히 자존심을 지킬 수 있을까. 그 해답이 있다. 피의자 신문 과정에서 자신을 방어하고 통제할 수 있는 만능 보검이 있다. 미란다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다. 우리의 수사 관행에서는 미란다 권리 행사가 여전히 매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누구나 미란다 권리를 이해하고 행사할 수 있는 역량을 스스로 갖추어나갈 때 우리의 형사 사법 구조의 발전을 앞당길 수 있다. 미란다 권리 행사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미란다 원칙은 수사관이 피의자를 체포할 때와 신문할 때 그 전에 먼저 피의자에게 수사관의 질문에 진술을 거부할 권리(묵비권)와 변호인의 도움을 받을 권리(변호사 조력권) 등이 있음을 구두로 읽어주는 것을 말한다. 수사관은 피의자가 미란다 권리를 이해하고 그 권리 행사 여부를 스스로 판단해 결정하도록 미란다 경고를 할 의무가 있다.

미란다 원칙은 미국 연방대법원의 판례에서 유래한다. 1966년 미국 연방대법원이 수사기관이 미란다라는 피의자를 체포하면서 경고를 하지 않고 얻어낸 자백을 그의 유죄 증거로 쓸 수 없다고 해 미란다에게 무죄를 선고함으로써 확립된 원칙이다. 수사관은 피의자를 체포하거나 신문하기 전에 미란다 경고를 반드시 해야 할 법적 의무가 있게 된 것이다.

미국 수사관들은 피의자를 체포하거나 신문하기 전에 다음 경고문을 읽어준다.

 

1. 당신은 묵비권을 행사할 권리가 있습니다.

2. 당신이 하는 모든 말은 법정에서 당신에게 불리한 증거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3. 당신은 변호사를 선임할 권리가 있습니다.

4. 당신이 변호사를 선임할 수 없을 경우, 무료로 국선변호인이 선임될 것입니다.

 

미국은 주에 따라서 미란다 권리의 행사를 보장하기 위해 추가 내용을 포함하기도 한다. 그리고 수사관은 피의자 신문에 들어가기 전에 피의자가 자신의 미란다 권리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질문을 반드시 해야 한다.

예를 들어 필라델피아 경찰의 미란다 카드를 보면 전면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당신이 다음과 같은 법적 권리를 갖고 있다는 것을 설명하고 경고할 의무가 있습니다.

A. 당신은 묵비권을 갖고 있어 아무 말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B. 당신이 말한 것은 법정에서 당신에게 불리하게 사용될 수 있습니다.

C. 당신은 우리가 질문하기 전에 당신이 원하는 변호사와 상의할 권리가 있고, 우리가 질문하는 동안 변호사를 배석시킬 권리도 갖고 있습니다.

D. 만약 당신이 변호사를 선임할 경제적 능력이 없지만 그래도 변호사를 원한다면, 우리가 질문을 시작하기 전에 공익변호사가 선임될 것입니다.

E. 당신은 우리에게 진술을 하더라도 언제나 원할 때에 중단할 권리가 있습니다.

 

미란다 카드의 후면에는 피의자가 미란다 권리를 이해했는지 그리고 그 권리를 행사할지를 확인할 자세한 질문이 인쇄되어 있다.

 

피의자들에게 물어보아야 할 질문

1. 당신은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것과 아무 말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

2. 당신이 한 말이 당신에게 불리하게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

3. 묵비권을 행사하고 싶습니까?

4. 우리가 질문을 하기 전에 변호사와 상의할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5. 만약 당신이 변호사를 선임할 경제적 능력이 없지만 그래도 변호사를 원한다면, 공익변호사가 선임될 것이고 그때까지 우리는 아무런 질문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6. 당신은 지금 변호사와 상의하고 싶습니까? 혹은 우리가 질문을 하는 동안 변호사를 당신과 함께 배석시키고 싶습니까?

7. 아무런 강요나 두려움 없이 당신의 자유로운 의지에 의해, 그리고 어떤 협박이나 보상받을 약속 없이 우리의 질문에 답할 용의가 있습니까?

 

미국에서는 피의자가 미란다 권리를 행사하겠다고 하면 신문을 더 이상 진행해서는 안 된다. 수사관이 피의자에게 질문을 하기 위해서는 피의자의 동의를 얻어야 하고, 피의자는 신문을 끝낼 수 있는 권리가 보장된다.

 

우리나라에서도 영화나 드라마에서 당신은 묵비권을 행사할 권리가 있고 변호사를 선임할 권리가 있다는 미란다 경고를 읽어주는 장면을 종종 볼 수 있다. 촛불 집회나 시위 등에서 집회시위 참가자들을 집단으로 현행범 체포를 할 때는 경찰 지휘자가 메가폰으로 크게 미란다 경고를 하거나 전경들이 미란다 경고를 하기도 한다. 때로는 피의자를 체포한 뒤 경찰차 안에서 미란다 경고를 하거나 경찰서까지 연행한 후에야 하기도 한다.

우리나라의 대법원 판례는, 미란다 고지는 체포를 위한 실력 행사에 들어가기 전에 미리 해야 하는 것이 원칙이나, 달아나는 피의자를 쫓아가 붙들거나 폭력으로 대항하는 피의자를 실력으로 제압하는 경우에는 붙들거나 제압하는 과정에서 하거나, 그것이 여의치 않은 경우에는 일단 붙들거나 제압한 후에 지체 없이 해야 한다고 판시하고 있다.

체포하기 전에 미란다 경고를 하지 않고 체포하면 불법 체포이므로 여기에 저항한다고 해서 공무 집행 방해가 되지 않는다. 미란다 경고를 위반하고 불법 체포한 후 수사를 통해 자백을 받았더라도 그 자백은 미국의 미란다 사건에서처럼 피의자의 유죄 증거로 사용할 수 없다.

그런데 여기서 정확히 알아둘 것이 있다. 미국은 체포 전에 하는 미란다 경고와 피의자 신문 전에 하는 미란다 경고의 내용이 같지만, 우리나라는 둘 사이에 미란다 경고의 내용에 차이가 있다. 우리나라의 피의자 신문 전 미란다 경고의 내용은 미국의 미란다 경고의 내용과 거의 같다. 물론 다른 내용도 있다. 어떻게 다른지 비교해보자.

먼저 우리나라의 체포 전 미란다 경고의 내용을 보자.

 

형사소송법 제200조의5(체포와 피의사실 등의 고지):

검사 또는 사법경찰관은 피의자를 체포하는 경우에는 피의사실의 요지, 체포의 이유와 변호인을 선임할 수 있음을 말하고 변명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

 

체포 전 미란다 경고의 내용에는 피의 사실 요지와 체포 이유, 변호인 선임권은 언급하면서 묵비권에 관한 내용은 없다. 흔히 현장에서는 묵비권이 있음을 고지하는데, 만약 체포하기 전에 미란다 경고를 할 때 묵비권이 있음을 고지하지 않았을 경우에는 미란다 권리를 제대로 고지하지 않은 불법 체포일까? 수사관들은 체포한 이후 피의자 신문에 들어가기 전에도 끊임없이 질문함으로써 사실상의 피의자 신문을 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형사소송법 규정에도 불구하고 헌법 제12조 제2형사상 자기에게 불리한 진술을 강요당하지 아니한다는 규정의 취지에 비추어보더라도, 체포하기 전 피의자에게 고지하는 미란다 경고의 내용에도 묵비권이 있다는 사실이 포함되어야 적법한 체포 절차일 것이다.

우리나라의 피의자 신문 전 미란다 경고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형사소송법 제244조의3(진술거부권 등의 고지)

1. 검사 또는 사법경찰관은 피의자를 신문하기 전에 다음 각 호의 사항을 알려주어야 한다.

1. 일체의 진술을 하지 아니하거나 개개의 질문에 대해 진술을 하지 아니할 수 있다는 것

2. 진술을 하지 아니하더라도 불이익을 받지 아니한다는 것

3. 진술을 거부할 권리를 포기하고 행한 진술은 법정에서 유죄의 증거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것

4. 신문을 받을 때에는 변호인을 참여하게 하는 등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수 있다는 것

2. 검사 또는 사법경찰관은 제1항에 따라 알려 준 때에는 피의자가 진술을 거부할 권리와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를 행사할 것인지의 여부를 질문하고, 이에 대한 피의자의 답변을 조서에 기재해야 한다. 이 경우 피의자의 답변은 피의자로 해금 자필로 기재하게 하거나 검사 또는 사법경찰관이 피의자의 답변을 기재한 부분에 기명날인 또는 서명하게 해야 한다.

 

앞에서 본 미국의 미란다 카드의 전면에 담긴 미란다 경고와 유사한 내용이 형사소송법 제244조의3 1항에 규정된 각 호이다. 네 가지 내용이다. 그리고 미국의 미란다 카드의 후면에 담긴, 미란다 권리를 이해하고 미란다 권리를 행사할지를 묻는 질문과 유사한 것이 형사소송법 제244조의3 2항이다.

 

우리나라의 미란다 경고의 내용과 미국의 미란다 경고의 내용 사이에는 어떤 차이점이 있을까. 미란다 권리 중 우리나라에는 없는 것이 있다. 만약 우리나라에서 변호사를 선임할 경제적 능력이 없는 체포 피의자가 신문 과정에서 변호인의 참여를 요구하는 경우 신문은 어떻게 진행될까? 피의자가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사선 변호인을 선임할 때까지 신문은 중단될까?

형사소송법 제244조의3 1항 제4호를 보면, 신문을 받을 때에는 변호인을 참여하게 하는 등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수 있다는 규정일 뿐이므로 피의자 본인이 사선 변호인을 선임할 경제적 능력이 없으면 신문 과정에서 변호인의 도움을 받을 권리가 원천적으로 봉쇄되는 것이 된다. 우리나라에서 변호인을 선임할 경제적 능력이 없는 피의자가 신문 과정에서 국선 변호인의 도움을 받으려면 다음과 같은 조건이 필요하다.

피의자에 대한 구속영장이 청구되어 영장실질심사(구속 전 피의자 심문)를 받아야 한다.

영장실질심사를 받는 피의자에게 사선 변호인이 없는 경우 국선 변호인이 자동으로 선정된다. 그렇게 되어 영장실질심사에서 구속영장이 발부되어 구속되거나 기각되어 불구속으로 석방된 경우, 그 후 기소되기 전까지 국선 변호인이 선임된 효력이 지속된다. 영장실질심사를 받은 뒤에 계속되는 구속 또는 불구속 수사에서 피의자 신문을 받게 되는 경우, 그때 국선 변호인에게 신문에 참여할 것을 요청할 수 있다. 그런데 국선 변호인이 피의자 신문에 참여해 변호인 조력권을 행사하기에는 국선 변호료 지급이 현실적이지 않다. 어떤 헌신적인 국선 변호인이 봉사 정신으로 도우려 하는 경우가 아닌 한 그 조력을 받을 가능성은 전무하다.

미국에서 만약 변호인을 선임할 경제적 능력이 없는 피의자가 체포된 경우 신문 과정에 변호인을 참여시키고 도움을 받겠다고 하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까? 앞서 밝힌 미국의 미란다 경고의 내용을 보라.

당신은 우리가 질문하기 전에 당신이 원하는 변호사와 상의할 권리가 있고 우리가 질문하는 동안 변호사를 배석시킬 권리도 갖고 있습니다.”

만약 당신이 변호사를 선임할 경제적 능력이 없지만 그래도 변호사를 원한다면, 우리가 질문을 시작하기 전에 공익변호사가 선임될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변호사를 선임할 경제적 능력이 없지만 그래도 변호사를 원한다면, 공익변호사가 선임될 것이고 그때까지 우리는 아무런 질문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어떤 생각이 드는가? 미국의 미란다 권리의 핵심은 바로 가난한 피의자도 국가의 도움을 받아 신문 과정에서 변호인 조력권을 행사할 수 있게 하는 데 있다. 미국에서는 가난한 피의자가 미란다 권리를 행사하겠다고 하면 공익 변호사(국선 변호인)가 달려오기까지 피의자 신문이 중단된다. 아무런 질문을 할 수 없다.

미란다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미국은 예산을 투자해 공익변호청을 두고 공무원 신분의 공익 변호사를 고용해 법률 구조를 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이를 참고해 가난한 사람도 체포 당시부터 즉시 변호인 조력권을 보장받을 수 있도록 법률 구조 제도를 발전시켜나가야 한다.

미란다 권리를 포기하게 만드는 것들

 

미국에서나 우리나라에서나 신문을 받는 피의자의 최선의 선택지는 명확하다. 피의자는 미란다 권리를 행사해도 아무런 법적 불이익이 없을뿐더러 오히려 더욱 유리해진다. 수사기관 입장에서는 미란다 권리를 피의자에게 제대로 고지해서 이해시키고 권리 행사를 보장하면 할수록, 피의자 신문에서 증거를 수집하기가 어려워진다. 특히 미국에서는 가난한 피의자라도 미란다 권리를 행사함으로써 국선 변호인을 요청할 수 있으니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그렇다면 피의자 신문이 수사 절차에서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아야 정상일 텐데 현실은 정반대이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미국에서도 대부분의 피해자가 미란다 경고를 듣고도 권리를 포기하고 만다. 이러한 선택이 참으로 이상하게 보이지 않는가? 바로 여기에 수사기관의 수사 기법, 즉 미란다 권리 행사를 유명무실하고 무력하게 만들기 위한 전략과 전술이 도사리고 있다. 수사관들의 갖은 술책을 간파하고 피의자가 미란다 권리를 당당히 행사하도록 조력하는 것이 변호인의 무거운 책무이다. 공정한 사법 체계를 구축하기 위해 헌법과 법률이 보장한 당연한 권리 아닌가.

피의자가 신문 과정 초입에 미란다 경고를 고지받고도 권리를 포기하는 순간, 그 후 이루어지는 신문은 그 적법성이 무한대로 신뢰받게 된다. 수사관들로서는 신문 초기에 미란다 권리를 포기하게 만드는 데 전력을 들일 수밖에 없다. 피의자는 미란다 권리를 포기하는 순간 심리적 신문 기법을 훈련받은 수사관들에게 농락당할 수밖에 없는 비운의 처지로 전락하게 된다.

 

이제 우리나라에서 피의자가 미란다 권리를 행사할 경우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살펴보자.

수사관부터 미란다 원칙을 본격적인 신문에 들어가기 전 피의자에게 읽어주는 요식 절차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미란다 권리를 포기해야 착한 피의자이고 선처해줄 수 있다는 구태가 여전하다. 미란다 권리를 행사하려는 피의자를 보면 무척 신경질적으로 반응하기 일쑤다. 피의자 입장에서는 수사관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 괘씸죄에 걸려 불리한 일을 당하지 않을까 초조할 수밖에 없다. 변호인은 묵비권 행사가 제일 유리하다고 조언하지만 그런 수사관 앞에서 묵비하기란 보통의 용기가 아니고는 어렵다. 현실이 그렇다.

그래도 시국 사건에서는 묵비권이 정착되면서 모범 사례가 등장하고 있다. 피의자가 참여한 변호인을 통해 일체 진술을 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히고 인적 사항까지 묵비하는 경우도 있다. 그럴 때 어떤 수사관(경찰 또는 검사)은 피의사실의 요지를 묻는 신문만 한 다음 바로 신문을 종결한다. 다른 증거들로 수사를 진행하면서 향후에도 일체 진술을 거부한다는 피의자의 의사를 확인한 이상 더 이상 출석 요구를 하지 않는다. 이것이 법을 제대로 알고 실천하는 모범 수사관의 모습이라 하겠다.

어떤 수사관은 피의자와 함께 출석한 변호인이 일체 묵비권을 행사하겠다는 의사를 밝히자, 피의자가 묵비하더라도 자신은 질문할(신문할) 권리가 있다며 계속 질문을 이어간다. 이렇게 묵비권을 행사하는데도 즉시 조사를 마무리하지 않고 계속 신문하는 것은 자백을 강요당하지 않을 권리를 침해하는 위법적 신문이다. 필자는 그런 경우 항의하며 피의자와 함께 바로 조사실에서 퇴거한 적이 있다. 계속 신문할 권리가 있다고 우기던 그 수사관은 이후 더 이상 출석을 요구하지 않고 다른 증거로 수사를 진행했다. 그 사람은 그래도 미란다 권리 행사를 존중하는 축에 해당한다.

여기까지는 불구속 피의자의 사례이다. 구속 피의자가 묵비권을 행사하겠다며 신문을 중단하고 유치장이나 구치소롤 보내줄 것을 요구했다고 해보자. 당장 매일 불러내는 수사관을 버텨내야 한다. 수사관은 피의자가 묵비권을 행사한다는 이유만으로 변호인이 참여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장시간 신문을 진행한다. 자백을 강요한다. 온갖 조롱과 모욕을 퍼부으며 묵비를 풀고 말겠다는 의지로 고립무원의 피의자를 괴롭히는 것이다. 시국 사건에서 국가보안법 혐의로 불려온 피의자를 상대로 공안 수사기관이 그런 구태를 버리지 못하고 있다. 그래도 수사관이 계속 피의자 신문을 이어간다면 사실상 미란다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므로 법적 쟁송으로 법원의 판단을 구해봐야 한다. 한번은 구속 피의자가 출정을 거부하며 법적 쟁송을 했으나, 법원은 구속 피의자를 신문하기 위해서는 강제로 유치장이나 구치소에서 조사 장소로 강제 인치할 수 있다는 판단을 했다.

묵비권을 행사하는 피의자를 상대로 구속 기간 내내 하루도 거르지 않고 수사관 수십 명이 드나들며 갖은 교묘한 방법으로 피의자를 종일 조였다 풀었다 하는 신문. 피의자는 견디다 못해 중도에 묵비권 행사를 포기하고 만다. 이러한 신문을 허용하는 일은 헌법이 보장하는 진술거부권 행사를 사실상 불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다행히 시국 사건에서 미란다 권리 행사를 수사 방해로 여기며 피의자를 괴롭히는 수사관들의 위법한 행태에 대해 위법한 수사로 판단한 판례들이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

 

시국 사건에서 집단으로 현행범으로 체포된 피의자들 중에는 인적 사항까지 진술하기를 거부하는 경우가 있다. 어떤 변호사는 인적 사항까지 묵비할 수 있다고 하고, 또 어떤 변호사는 그럴 필요가 있냐고 서로 다른 조언을 한다. 각자의 수준에서 스스로 판단해 묵비권을 행사하면 그만이다. 문제는 인적 사항까지 묵비하는 피의자에게 함께 연행된 다른 피의자들에 비해 불이익을 주는 수사관의 저급한 수사 방식에 있다. 인적 사항을 묵비하는 경우 수사관은 피의자의 신분을 확인하는 절차로 지문 날인을 채취하기 위해 검증영장을 청구해야 하므로 일거리가 늘어나게 된다. ‘다른 피의자는 인적 사항을 말하는데 너 때문에 나만 무능한 수사관이 되었다며 피의자에게 짜증을 내고 불이익을 줄 것처럼 갈구기시작한다. 변호인이 언제 어디에서 어떤 이슈로 체포된 성명 불상자로 특정해 변호인 접견 신청을 하면, 인적 사항이 특정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접견을 거부하기도 한다.

또 인적 사항까지 묵비하는 피의자에게는 구속영장을 청구할 사건이 아닌데도 체포 후 48시간 구금권을 악용해 석방 지휘를 뒤늦게 하는 불이익을 주기도 한다. 공공의 목적을 위해 집회와 시위의 권리를 행사한 시민들이 수사관의 치졸한 술책에 막혀 결국 미란다 권리를 포기하고 진술을 하게 되는 현실이 너무나 안타깝다. 피의자 입장에서는 진술을 해서 유리할 리가 없다. 전문 수사관이 피의자를 위하는 방향으로 조서를 꾸밀 까닭이 없는 것이다. 변호인의 조력을 받지 못하는 상태에서 조금이라도 빨리 석방되고자 하는 유혹에 함부로 진술했다가 뒤늦게 후회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어떻게 옥죄고 통제하는가

 

아직도 사람들은 미란다 권리를 행사하면 수사 절차에서 불이익을 당한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그나마 수사관이 피의자에게 미란다 권리를 읽어주기 시작한 것도 2000년대에 들어와서다. 그전에는 신문하기 전에 미란다 권리를 고지했다고 조서에 적어놓기만 하고 실제로는 하지 않았다. 수사관 스스로 미란다 권리를 고지하는 것을 어색하게 여겼고, 그렇게 했다가 자칫 자신의 우월적 지위가 깎이고 피의자에게 쉽게 보일까 봐 걱정했던 것이다. 미란다 권리를 구두로 고지하는 것을 거추장스러운 절차로 생각해 생략해놓고는 조서에 고지했다고 적은 다음 피의자에게 서명날인을 받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런 전근대적 사고가 만연하던 시절이 지났으니 그럼, 미란다 권리는 보장되고 있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미란다 권리를 포기하는 현실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피의자에게 미란다 권리를 행사할 것을 조언하는 변호사에 대한 음해 또한 난무한다.

필자는 미란다 권리를 행사할 것을 조언했다는 이유로 조사실에서 강제로 쫓겨난 적이 있다. 변호인이 진술거부권을 행사하라고 조언도 하지 못하는가. 변호인이 묵비권을 교사했다는 기사가 보수 언론에 대문짝만 하게 나기도 했다. ‘묵비권 교사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시민들의 미란다 권리 행사를 방해하는 수사 현실이 우습다.

수사기관에서 피의자가 묵비권을 행사하겠다고 밝히면 바로 다음 같은 질문이 이어진다.

묵비권을 행사하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기가 막힌다. 방금 앞서 묵비할 권리가 있다고 수사관 자신의 입으로 말해놓고는 피의자가 그 권리를 행사하겠다고 하자마자 바로 묵비권을 행사하는 이유를 묻는 것이다. 아연실색한다. 이게 말이 되는가. 권리를 행사하겠다는데 그 이유를 묻는 저의가 무엇인가. 그런 수사관에게는 묵비권 행사를 방해한다고 따져야 하는데 대부분의 피의자는 묵비를 풀고 다음과 같이 답한다.

방금 접견한 변호사가 묵비권을 행사하라고 하기에 묵비하는 것입니다.”

묵비권을 교사하는 변호인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이것이 우리나라 형사 사법의 현실이다. 그다음 이어지는 수사관의 질문을 보자.

그럼, 피의자는 진술을 하려 하는데 변호인이 묵비하라고 했습니까?”

피의자는 그 질문에 보통 라고 대답한다. 그다음 질문은 어느새 변호인의 비밀접견권을 침해하는 신문으로 변해 있다.

방금 변호인과 접견할 때 어떤 대화를 나누는 과정에서 변호인이 묵비권 행사를 하라고 했습니까?”

피의자는 묵비권 행사를 하겠다는 처음의 의사는 다 잊어버리고 다음과 같이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이야기를 꺼낸다. 변호인과 나눈 접견 내용을 솔직히 말함으로써 수사관의 동정과 선처를 받으려는 요량이다.

사실 저는 모든 것을 털어놓고 수사관님의 질문에 있는 그대로 진술하겠다고 변호인에게 이야기했습니다. 하지만 변호인은 제 말을 자르며 무슨 소리냐, 내가 시키는 대로 무조건 묵비해라, 그래야 유리하다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변호인과 피의자 사이를 이간질하며 변호인의 비밀접견권을 침해하는 수사관의 질문에 이골이 날 정도이다. 필자는 묵비권을 행사하면 수사관이 어떤 질문을 이어가는지를 미리 상세히 의뢰인에게 설명해둔다. 그러지 않으면 십중팔구 의뢰인은 미란다 권리를 행사했다가는 수사관만 화나게 해 자신에게 불이익이 생긴다고 생각하는 것이 현실이다.

한때 필자는 탈북 조작 간첩 사건의 피의자에게 허위 진술을 종용했다는 이유로 검찰로부터 징계신청을 당했고, 동료 변호사 한 명도 피의자에게 진술거부권을 조언했다는 이유로 징계 신청을 당했다. 자신들을 단죄할 곳이 없다는 것을 알고 수사권을 악용하는 오만방자한 수사기관의 모습이다. 피의자에게 진술거부권을 행사하면 불이익이 발생할 것처럼 겁을 주어 변호사와 피의자 사이를 이간질하는 내용의 피의자신문조서를 꾸민 다음, 이를 증거로 변호인의 징계를 신청하는 것이 오늘도 벌어지는 수사 현실이다.

 

이 글은 미란다 권리 행사가 피의자 신분이 된 시민에게 제일 유리한 선택지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 목적이다. 그런데 미란다 권리 행사를 방해하는 저질 수사의 현실을 고발하다 보니 오히려 시민들에게 미란다 권리를 행사하다가는 낭패 보기 쉽다는 인식을 심어주지 않을까 걱정된다. 저질 수사에 농락당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 자존심을 굽혀서는 안 된다. 수사관이 피조사자를 교묘하게 옥죄고 통제하려고 해도 그 수법에 맞서야 한다. 다음 사례를 보자.

국정원의 한 관계자가 보수 언론에 어떤 민변 변호사가 간첩을 옹호한 행태라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어떤 변호사는 졸고 있는 자신을 깨웠다는 이유로 강압적 수사이니 출석하지 않겠다며 출석 불응의 책임은 국정원에 있다, 출석 요구시 법적 조치를 취하겠다는 내용증명을 발송했다.”

국정원이 문제 삼은 어떤 변호사가 바로 필자이다. 사연은 이렇다. 필자는 국정원 조사실에서 참고인 조사를 받는 과정에 변호인으로 참여했다. 참고인은 조사 중에 일체 진술을 하지 않은 채 눈을 감고 있었고, 변호인도 옆에서 함께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런데 국정원 수사관은 느닷없이 책상을 탁탁 두드리며 변호인’ ‘참고인수차례 부른 후 눈을 감고 있는 것은 괜찮지만 수면은 수사 방해입니다라며 따지고 들었다. 변호인이 조력을 하기는커녕 수면을 취하러 왔냐는 식의 모욕적 언사였다.

참고인 조사와 무관한 그 말에 필자는 강력히 항의했다.

당신이 도덕 선생인가. 우리가 당신의 수업을 바른 자세로 들어야 하는 존재인가. 왜 훈육하려 드는가. 조사받는 개인의 자유로운 인격 형성 과정에까지 관여하려 드는 것이냐. 우리가 조사의 객체에 불과한가. 조사 중에 당신을 위해 어떻게 하는 것이 바른 자세인가. 우리가 눈을 뜨고 조사를 받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이 우리가 당신에게 갖추어야 할 예의인가.”

그리고 당당히 주장했다.

조사를 받는 피의자나 참고인이 반드시 눈을 뜨고 신문에 응해야 하는가. 왜 졸면 안 되는가. 그게 왜 수사 방해인가. 피곤해서 조는 피조사자를 자지 못하게 하고 계속 신문하는 것이 고문 아닌가. 잠 안 재우기 고문 아닌가.”

사실 국정원 조사실에서 졸 수 있는 사람이 대한민국에는 없지 않을까 싶다. 국정원 수사관은 참고인 조사 중 참고인과 변호인이 심리적 불안을 달래기 위해 잠시 눈을 감고 있고 있었을 뿐, 수면을 취할 수 없는 상황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진술을 일체 하지 않는 참고인을 괴롭힐 목적으로 교묘한 심리적 책략 차원에서 시비를 건 것이었다. 조사실에서는 마음대로 눈도 감을 수 없는 것처럼 말함으로써 심리적 압박감을 야기했다. 이것이야말로 참고인의 인권과 변호인의 변호권을 침해한 것이다.

필자는 국정원에 내용증명을 보냈다. 국정원 수사관의 위법한 수사 행태를 지적하며 수사관을 교체하고 처벌할 것 등 적절한 조치를 취하라고 요구했다. 만일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국가보안법상 참고인에 대한 강제 소환 조항을 악용해 참고인과 변호인에게 계속 출석 요구를 할 경우, 가능한 법률적 대응을 취하겠다고 밝혔다. 이 사례에서 보듯 위법하고 부당한 관행에 맞서 피의자의 권리를 한 치도 양보하지 말고 행사해야 한다. 시민들이 미란다 권리를 적극 행사하는 사례가 쌓일수록 피의자에게 미란다 권리가 보장되는 수사 관행이 만들어지고 우리나라의 사법 절차가 더욱 공정해질 것이다.

멀쩡한 시민이 허위 자백을 하게 되는 이유

 

시민들은 허위 자백을 하는 사람이 따로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자신도 일정한 조건이 충족되면 허위 자백을 하게 된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하지 못하고 살아간다. 물리적 강압이 사라진 현재의 피의자 신문 과정에서 무고한 사람이 어떻게 허위 자백을 할까 싶을 것이다. 미치지 않고야 그런 일이 가능할까. 하지만 1966년 미란다 판결 이후 소위 현대화된 심리적 피의자 신문과정에서는 수사관들이 심리적 조종과 협박, 속임수로 결백한 정상의 성인이라도 허위 자백을 이끌어낼 수 있다. 지극히 평균적이고 정상적인 사람도 수사기관의 밀실에서 빡빡한 조사를 맞닥뜨리게 되면, 전문 수사관의 심리 컨트롤 수사 기법에 말려들어 허위 자백을 하게 된다. 현재의 형사 사법의 구조가 그렇다는 것을 시민들은 보편적 상식으로 인식해야 한다.

멀쩡한 사람이 피의자 신문 과정에서 허위 자백을 하는 상황이 어떻게 가능할까? 필자가 반복해서 강조하지만 미란다 권리를 포기하는 순간 방아쇠는 당겨진다. 어떻게 그렇게 될까? 미란다 권리를 행사하는 피의자에게는 허위 자백으로 향하는 상황이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 불구속 피의자라면 미란다 권리를 행사하고 바로 조사 장소에서 나오면 된다. 구속 피의자는 미란다 권리를 행사하겠다며 조사실에서 퇴거하게 해줄 것을 요구하고 유치장이나 구치소로 돌아가면 된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현실에서 피의자가 미란다 권리를 행사한다고 해서 수사관이 진술을 얻어내기를 단념하고 더 이상 소환 조사를 하지 않을까? 그런 경우는 별로 없다. 구속 피의자는 매일 강제 소환하고, 불구속 피의자도 계속 출석을 요구한다. 앞서 말했듯이, 미란다 권리 행사를 방해하고 자백을 강요하는 직권 남용의 행태가 다반사다. 개중에 드물지만, 더 이상 강제 소환이나 출석 요구를 하지 않는 모범적인 수사관도 있다. 이러한 현실에서 미란다 권리를 당당히 행사할 수 있을까? 미란다 권리를 행사하는 피의자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주로 시국 사건의 양심수들만이 미란다 권리를 당당히 행사해온 것이 역사적 사실이다. 일반 시민들은 미란다 권리를 행사했다가 낭패 보지 않을까 두려워한다. 진술을 하지 않더라도 불이익을 받지 않는다는 형사소송법의 미란다 권리의 내용을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드물다. 이처럼 미란다 권리를 행사하기 어려운 현실에서, 미란다 권리를 포기한 이후의 피의자 신문 과정은 수사관들의 농락에 빠져 허위 자백으로 가는 길로 활짝 열린다.

여기서 또 한 번 강조하건대 피의자가 된 시민에게는 신문 과정에서 미란다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 제일 유리하다. 어떤 이는 죄 지은 것도 없는데 수사관을 상대로 떳떳이 진술하는 것이 더 낫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시민과 변호사도 많다고 본다. 그러나 피의자가 진술하면 진술할수록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에서 멀어지고 마침내 수사관의 의도에 말려든다. 자신은 그렇게 진술하지 않았다고 주장해도 피의자신문조서에는 자신에게 불리한 내용으로 정리되어 적히는 경우가 흔하다. 필자는 뒤늦게 후회하는 수많은 시민을 오늘도 접하고 있다. 물론 수사관 입장에서는 피의자 신문 과정에서 진실대로 진술한 사람도 나중에 변호사만 만나면, 또는 법정에만 가면 진술을 번복한다고 볼멘소리를 한다.

필자는 의뢰인이 미란다 권리를 포기하고 진술을 한 신문 과정에 참여한 경우, 변호인으로서 피의자신문조서에 서명날인을 한 경우가 거의 없다. 피의자의 진술이 사실 그대로 피의자신문조서에 적히는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피의자신문조서에 어떤 진술을 어떻게 남기느냐를 두고 수사관과 장시간 신경전을 치르느라 고생한 기억이 많다. 피의자에게 유리한 진술이 피의자신문조서에 반영되지 않은 경우가 많고, 일일이 이를 지적하며 조서를 수정할 것을 요구하다 보면 신경전과 언쟁이 불가피하다.

신경전을 방지하기 위해 필자는 진술을 하려는 피의자의 경우 영상녹화를 요청하고 영상녹화실에서 진술을 하도록 한다. 피의자는 자신의 진술이 신문 과정에서 어떤 의미를 갖게 되는지 잘 모른다. 수사관의 유도신문이나 전혀 불필요한 신문에 말려드는 경우를 필자는 자주 보았다. 그런 경우 바로 옆에서 부당한 신문 방법에 이의를 제기하며 의뢰인에게 진술거부권을 행사하도록 조언한다. 이때 미란다 권리를 이해하지 못한 수사관이 수사를 방해한다는 이유로 변호인을 조사실에서 강제로 내보내기도 한다. 이것이 위법하다는 것은 필자의 사건에서 대법원의 판결에 의해 증명되었다. 피의자는 신문 과정에서 진술을 하면 할수록 불리해지고, 조사 시간이 길어지며, 조서 정리를 둘러싼 신경전도 불가피하고 여러모로 피곤할 뿐이다.

 

이후 피의자 신문 과정에서 멀쩡한 시민이 허위 자백을 하게 되는 데는 수사관들의 갖가지 수사 기법이 결정적 역할을 한다. 어떤 수사 기법일까?

우선 신문 과정에서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환경을 조성함으로써 피의자에게 심리적 불안을 야기한다. 앞서 말했듯이, 내 집 같은 편한 분위기의 조사 장소는 없다. 누가 어떤 의도에서 그렇게 설계했는지는 몰라도, 시국 공안이나 강력 사건의 경우 조사 장소는 개방되지 않은 곳, 주로 일반인들의 눈길이 닿지 않는 폐쇄된 곳에 따로 위치한다. 조사 장소부터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환경이다. 혹시라도 일반 시민이 이런 사건에 연루되면 낯선 환경에서부터 겁을 먹기 시작한다. 사람을 쫄게 만들기 위해 조사 환경을 그렇게 조성한 것이 분명하다.

조사 시간도 수사관 마음대로다. 불필요하고 유도하는 질문을 지루하게 반복한다. 모욕성 질문처럼 범죄 혐의 사실과 관련 없는 질문도 되풀이한다. 피의자에게는 큰 스트레스다. 빨리 끝내고 집에 가고 싶은 피의자에게는 견디기 힘든 시간이다. 10여 년에 걸쳐 수십여 차례 해외를 드나든 피의자라면 출입국 내역을 하나하나 확인한다. 같은 형태의 질문이 지루하게 반복되면, 그 질문을 듣는 것 자체가 피곤의 연속이다. 수사관은 피의자의 그런 심리를 꿰뚫고 질문을 느릿느릿 수백 개를 하며 장시간 조사를 한다. 어떤 수사관은 압수한 이적표현물(?) 수십 권을 조사실에 가져다 놓고 한 권씩 펼치며 내용을 한 구절 한 구절 읽다시피 하며 신문하기도 한다. 그렇게 하루 종일 해도 한 달은 조사해야 소화될 것 같은 신문 방식이다. 장시간 반복되는 신문 과정을 연출해 피의자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것도 일종의 수사 기법임이 명백하다. 피의자와 변호인이 시간 끌기식 지리한 반복 신문이라고 항의하면 수사관은 자신의 권리라고 강변한다.

오전과 오후 장시간 신문 과정을 마치고 나서, 이제 곧 조사실을 나서서 집으로 돌아갈 줄로만 아는 피의자의 심리적 허점을 노리는 경우도 있다. 신문은 마쳤다고 하면서 피의자신문조서를 출력하는 데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면서 서너 시간을 끈다. 오탈자를 수정하느니 상부에 결재를 맡는다느니 하며 금방 집으로 돌아가리라고 믿던 피의자의 안도감을 꺾어버린다. 피의자는 무척 당황한다. 피의자신문조서를 가져올 때까지 수사관과 이런저런 말을 섞을 수밖에 없다. 시국 공안 사건에서 자주 쓰는 수법이다. 필자는 피의자 신문이 끝나면 바로 조사 장소에서 피의자신문조서를 출력하게 한다. 그들이 피의자신문조서를 출력하는 데 시간을 오래 끄는 것 같으면, 그냥 피의자와 함께 조사실을 나와버린다.

요즘은 이런 일도 옛일이다. 시국 공안 사건에서는 대부분의 피의자가 미란다 권리를 행사하며 묵비하는 이상 조서에 별다른 내용이 나올 것이 없다. 그러니 조서를 출력해 확인할 필요도 없이 조사를 마치는 대로 곧바로 나와버린다. 미란다 권리를 행사하는 와중에 수사관이 피의 사실의 요지를 압축적으로 묻지 않고 시간을 끌며 조사하는 경우, 항의를 하며 조사를 중단시키고 더 이상 출석을 요구하지 말 것을 경고한 다음 나와버린다. 다시 수사기관이 출석을 요구하면 출석해서 이전과 똑같이 대응한다.

강압과 회유의 터널 1

 

피의자는 수사관의 태도나 분위기를 잡는 언행에도 주눅 들고 겁을 집어먹는다. 조사하는 수사관과 눈만 마주쳐도 심리적 불안을 느낄 수 있다. 어떤 피의자는 수사관의 눈이 뱀 같아서 무서웠다고 하고, 수사관의 인상이 불도그처럼 험상궂어 보기만 해도 주눅부터 들었다고 한다. 험악한 인상의 수사관이 조사실에 들어와 피의자가 앉은 자리 주위를 한 바퀴 돌기만 해도, 앞자리에 앉았다 벌떡 일어서기만 해도 군기가 든다. 처음 본 피의자에게 다가와 능글능글 웃으며 인사하더니 바로 옆에 앉아 피의자의 무릎에 손을 얹으며 이야기를 걸어오는 수사관도 봤다. 피의자가 긴장을 풀기는커녕 낯선 수사관의 손이 몸에 닿는 순간 질겁하며 얼어붙는다. 한순간 분위기가 어색해진다. 필자는 그 수사관의 수법이 너무 화가 나서 처음 본 그 사람 옆에 다가가 똑같이 어깨를 꽉 끌어안아주었다.

참으로 고약한 일을 서슴없이 저지른다. 그들 나름대로 수십 년에 걸쳐 터득한 분위기 잡기용, 피의자 겁박용 수사 기법이다. 험한 인상은 어쩔 수 없더라도 부드럽고 상냥한 태도로 조사를 하면 얼마나 좋을까 마는 군기를 잡는 수사 기법은 좀처럼 바뀌지 않는다. 악역을 자처한 수사관의 눈빛이며 언행 모두가 피의자나 변호인에게 비난을 가하고 시비를 유발하며 모욕을 주는 것처럼 보인다.

피의자 신문에는 주신문관과 참여수사관이 입회하는 것이 원칙이다. 가끔 심부름 때문에 다른 수사관이 압수물을 갖고 들어올 수도 있다고 치자. 사회적 이슈가 된 중요 사건이나 시국 공안 사건의 경우에는 두 신문관 이외에도 수많은 눈들이 피의자 신문 과정을 들여다본다. 피의자의 태도나 언행에 약점을 잡고 시비를 걸기 위해 십여 명이 조사실로 들어와 에워싸고 온갖 비난을 들이대는 경우도 있다. 조사실 밖의 관찰실에서 조사실을 모니터링 하는 수사관도 네댓 명이 있고, CCTV 영상으로 신문 과정을 모니터링하는 지휘통제실의 수사관도 여럿 있다. 주신문관과 참여수사관 이외에 신문 과정에 관여하는 수많은 수사관들의 존재 역시 스트레스를 불러일으킨다. 피의자나 변호인이 보여주는 태도나 언행을 분석하면서 중간중간 조사실을 제 집처럼 들락날락한다. 문자메시지로 이래라 저래라 지시나 코치를 일삼는다. 그들의 존재야말로 피의자나 변호인을 군기 잡으려는 목적 외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필자는 서울시 공무원 간첩 조작 사건 당시 유우성 씨의 피의자 신문 과정에 참여한 적이 있다. 필자가 참여하자 그때부터 무서운 수사관들이 조사실에서 종적을 감추었다고 한다. 그전까지 반말로 조사하던 이들이 사라지고 점잖게 존댓말을 쓰는 수사관들이 등장했다. 필자가 주신문관과 참여수사관에게 인적 사항을 물었더니, 보안 사항이라며 직책과 이름을 알려주지 않았다. 이에 대해 항의하자, 조사실을 모니터링하던 한 수사관이 노크도 없이 갑자기 들어와 변호사에게 이름을 알려주라고 지시하고 나갔다. 그런데 갑자기 들어온 그 수사관을 보자마자 유우성 씨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 부동자세를 취했다. 그전에 그 수사관에게 얼마나 겁을 먹었으면 그랬을까.

나중에 물어보니 그 수사관을 비롯해 무서운 수사관이 서너 명이 더 있었다고 한다. 필자가 변호인으로 참여하자 모두 조사실에서 꼬리를 감추고 사라졌는데, 수사관의 인적 사항을 알려주는 문제로 시비가 붙자 위법 수사가 외부에 공개될 것을 걱정한 그 수사관이 시빗거리를 차단할 생각에 부지불식간에 조사실로 들어왔던 모양이다. 필자는 상관으로 보이는 그 수사관이 노크도 없이 갑자기 조사실에 들어온 것에 대해 항의했다. 조사실의 외부에서 다른 조사관이 신문 과정을 모니터링하고 지시하는 것은 위법하다. 피의자신문조서에 이름이 남는 주신문관과 참여수사관이 신문을 책임지고 진행하라고 요구했다. 그들은 조사실 밖에서 모니터링을 하는 수사관은 없고 외부 지시도 받지 않는다고 했다. 거짓말이다.

피의자 한 사람을 두고 여러 수사관이 조사 장소 주변을 기웃거리고 원숭이 보듯 구경하다가 온갖 모욕적인 언사를 뱉고 지나간다고 상상해보라. 그런 분위기를 견뎌낼 피의자는 많지 않다. 강력계 형사 전부가 주눅 든 피의자 주변을 오가며 자백하지 않는다고 기분 나쁜 표정을 짓는다면 피의자에게 가해지는 스트레스는 심각하다. 거기에 욕까지 하면서 지나가다가 나이 어린 피의자라고 훈계를 하고 뒤통수를 한 대씩 때리기라도 하면, 수사관이 피의자를 의심해 추궁하며 자백을 강요하는 내용 그대로 허위 자백을 하게 될 수 있다. 실제 필자가 맡았던 사건에서 벌어진 일이다.

특히 공범이라고 추궁당하는 피의자일 때 더욱 그렇다. 공범이라 의심받는 피의자들은 서로 분리해 신문을 진행하는데, 공범 사이를 이간질하는 방식을 쓴다. ‘다른 공범은 이미 자백했는데 너는 왜 부인하느냐며 추궁하기 시작한다. 그때 수사관들이 피의자 앞에서 군기를 잡고 비난을 가하며 자백을 강요하는 가운데 옆에서 도와줄 변호인마저 없다면 허위 자백을 할 개연성이 매우 높아진다.

 

***

 

서울시 공무원 간첩 조작 사건에서도 여러 탈북자가 수사기관과 법정에서 허위 진술을 했다. 중앙합동신문센터에서는 유가려 씨를 6개월가량 장기간 감금해놓고, 그 진술들을 제시하면서 마침내 오빠가 간첩이라는 허위 자백을 만들어냈다.

2013427일 유가려 씨는 기자회견을 통해 자신이 중앙합동신문센터에서 국정원 수사관들의 감금, 폭행, 가혹행위, 회유를 견디지 못해 오빠 유우성과 함께 북한의 간첩 활동을 했다는 허위 진술을 할 수 밖에 없었다고 폭로했다. 서울시 공무원 간첩 조작 사건의 진상을 세상에 처음으로 알린 기자회견이었다.

그런데 당시 기자회견 이후 주변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여동생이 아무런 근거 없이 오빠를 간첩으로 인정했겠느냐는 의구심이었다. 물리적 강압 수사에 못 이겨 허위 진술을 했다는 본인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요즘 세상에 고문으로 허위 진술을 받아냈다는 것이냐, 지금이 어느 때인데 허위 진술에 의한 간첩 조작이 말이 되느냐 등 의심이 팽배했다. 유가려 씨의 말을 어떻게 믿을 수 있냐는 말도 심심찮게 들렸다. 그런 까닭에 사건의 진상을 밝혀가는 과정은 국정원과 검찰의 간첩 조작 시도에 맞서 억울한 피해자의 인권을 옹호하는 지난한 싸움이면서, 또 한편으로는 우리 안에 가득한, 고문 피해자에 대한 의구심을 해소해나가는 과정이기도 했다.

지금은 서울시 공무원 간첩 조작 사건(대법원 무죄 확정), 보위사령부 직파 간첩 조작 사건(2심 무죄), 북한산 밴드를 붙여 거짓말 탐지기 검사를 통과했다는 보위사령부 직파 여간첩 조작 사건(대법원 유죄 확정) 등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불법적 강제 수사에 의한 거짓 자백이 많이 알려졌다. 모두 국정원 조사관이 시키는 대로 한 거짓 진술이었고, 변호인을 만나면서 과거 자백 전체를 부정한 경우다. 이제 국가정보원 수사관들이 중앙합동신문센터에서 한국 사법 체계를 알지 못하고 한국에 도와줄 연고가 없는 탈북자를 상대로 허위 진술을 만들어 간첩을 양성한다는 주장에 누구나 공감을 하리라 본다. 하지만 유가려 씨의 기자회견 당시만 해도 허위 진술에 의한 간첩 조작 사건의 진상을 알리는 데 우리 안에 가득한 몰이해와 의구심은 큰 장애물이었다.

 

유가려 씨는 외부에서 모니터링되는 일인 독방에 감금되어 사생활이 모두 감시당하는 가운데 허위 자백을 할 때까지 거의 매일 조사를 받았다. 그녀가 매일 숙제처럼 써내야 했던 진술서도 수천 장이 넘는다. 달력도 제공되지 않았고 방 바깥으로 나가려면 수사관들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가족과 전화 연락이 되지 않고, 편지나 면회도 되지 않는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하루 종일 조사를 받았다. 수사관들은 제대로 진술하지 않는다며 때리고, 욕하고, 물건을 던졌다. ‘화교 유가려라고 쓴 종이를 그녀의 등 뒤에 붙여 탈북자들 앞에 세워놓고 탈북자로 가장해 들어온 나쁜 년이다. 얼굴 보세요. 구경하세요라고 모욕을 주었다. 그녀는 이러다가 그냥 죽었으면 좋겠다, 죽었으면 마음 편하겠는데생각이 들어 자살을 시도하기까지 했다.

유가려 씨는 수사관들이 반복적으로 주입하는 다음과 같은 말을 믿고 오빠가 간첩이라고 허위 진술을 하게 되었다.

남한은 북한과는 법이 완전히 달라. 사람을 중시하고 인권을 보호하는 나라이기 때문에 아무리 큰 죄를 지어도 자기 죄를 반성하면 사형시키지 않고 교화도 보내지 않는단다. 죄를 인정한 사람은 국가에서 집도 주고 보호해주게 되어 있어. 그 대신 자기 죄를 인정하지도 반성하지도 않으면 오랫동안 교화를 가야 한다. 한국 법은 그래.”

네가 진술을 잘해야 네 오빠가 교화를 1년만 가게 된다. 너희가 둘 다 화교이기 때문에 이대로 한국에서 살지는 못한다. 원래 너희 둘 다 교화 가야 하지만 우리가 도와줘서 오빠만 짧게 교화 살고 나오게 해준다. 오빠처럼 짧게 교화 갔다 오고 반성하게 되면 나라에서 잘살 수 있게 보호해준다. 네가 진술을 잘못하면 오빠가 짧게 살고 나올 것도 길게 살고 나온다. 네 가족은 네 손에 달려 있다.”

여러분이 유가려 씨와 같은 처지라고 가정해보자. 동일한 환경에서 매일 조사받으며 스트레스를 받으면 여러분은 어떻게 했을 것 같은가. 수사관들이 반복적으로 주입하는 논리를 믿고 허위 자백을 하지 않았을까?

탈북자처럼 취약한 피의자의 경우 피의자 신문 과정에서 벌어지는 수사기관의 폭력은 지독하다. 조사 시간에 어떠한 규제도 없다. 구속 기간 내내 매일매일 조사가 가능하다. 휴식할 틈도 없는 장시간의 조사를 매일 견뎌낼 사람은 없다. 조사 시간에 대한 규제도 없이 장시간 조사를 통해 얻어낸 자백이 법정에서 무사통과되는 사법 체계는 공정성을 상실한 것이다. 이에 대해 아무런 문제의식도 갖지 않는 사회는 참혹하다. 마치 군대에서 가혹 행위가 이어져도 군대 가서 사람 된다는 식으로 군대의 참혹한 인권 침해를 방치하는 것과 진배없다.

강압과 회유의 터널 2

 

멀쩡한 시민이 허위 자백을 하게 되는 또 하나의 경우는 수사관의 회유에 넘어갈 때이다. 처벌 수위를 언급하며 위협하는 한편 자백의 대가를 약속한다. 수사관들이 즐겨 사용하는 수사 기법이다. 물리적인 강압과 어르고 달래는 말을 섞어 쓰면 더욱 효과가 좋다. 자백하지 않고 부인하는 경우 혹독한 처벌을 가할 것이라고 위협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혐의 사실을 시인하면 지금처럼 끝날 것 같지 않은 신문을 더 이상 받을 필요도 없고 관대한 처벌을 선처해주겠다고 한다. 가장 극심한 형태의 심리적 강압을 가하는 순간 언뜻 풀려나는 혜택을 보여주는 것이다. 멀쩡한 사람이 수사관의 그런 회유와 강압에 넘어갈 리가 없다고? 절대 그렇지 않다.

아무리 학력이 높고 머리가 좋은 사람이라도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미란다 권리 행사를 포기하고 그 권리 행사 자체를 상상조차 하지 못하는 가운데 장시간 신문을 받게 되면 이런 꾐에 한순간 넘어간다. 처음에는 저항할 수 있으나 어느 순간 피로도가 높아지고 스트레스가 가중되면 신문을 빨리 끝내고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쓰게 된다. 그 순간부터는 수사관들의 추궁 속에서 혐의를 벗는 것이 최선의 선택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수사관의 양형 협박과 회유 사이에서 어느 것을 선택하는 것이 가장 유리할지를 고민하게 된다. 일종의 고립감과 무력감이 뒤섞인 상태에 빠져들면서 허위 자백으로 이끄는 손을 잡고 만다. 시야와 정보를 차단하는 수사관에 가로막혀 암흑 같은 터널에 갇힌 신세가 되는 순간 터널의 출구는 수사관이 가리키는 곳밖에 없다고 믿게 된다. 꼼짝없이 수사관이 던지는 허위 자백의 올가미에 걸려든다. 수사관이 가리키는 곳에는 혐의를 벗을 수 있는 출구는 없고 오로지 유죄를 인정하는 자백의 출구밖에 없다. 그래서 허위 자백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허무맹랑한 탈북 여간첩 1로 유명한 여간첩 원정화사건에서 원정화의 간첩 공범으로 몰렸던 황 모 중위의 경우를 보자. 황중위는 기무사의 신문 과정에서 강압 수사를 견디지 못해 허위 자백을 하는 바람에 억울하게 옥살이를 했다.

그는 처음 참고인 신분으로 조사를 받을 때는 원정화가 간첩인 줄 몰랐다고 진술했다가 나중에는 원정화가 간첩임을 알았다고 허위 자백했다. 그 후에는 원정화의 진술에 맞추어 말을 바꾸었다. 그가 범죄 사실을 부인하다가 인정하게 된 것은 수사관들의 계속된 강압과 회유 때문이었다. 기무사 수사관은 그를 수시로 조사실 밖으로 데리고 나와 자백할 것을 회유했고, 그가 회유에 응하지 않고 결백을 주장하면 듣기 싫다는 식으로 책상을 내리쳤다. 신문 도중에 원정화가 그에게 간첩 신분을 밝혔다는 내용의 원정화의 피의자신문조서(형광펜으로 표시함)를 보여주면서 인정하라고 했다. 만약 계속 부인하면 원정화와 대질할 수밖에 없고 그때는 넌 죽는다며 심각한 상황이 벌어진다는 식으로 말했다. 한편으로는 인정하면 모든 조사가 끝나고 바로 조사실에서 나갈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허위 자백하고 말았다.

황중위는 영장실질심사와 검찰 수사 과정에서도 허위 자백의 내용을 유지했다. 기소된 뒤 필자를 만나고 나서야 비로소 용기를 내어 자신의 자백이 비자발적 허위 자백이었음을 다투게 되었다. 이후 억울하게 누명을 쓴 과정을 호소했다. 사건의 실체에 대해 일관된 진술을 했다. 반면에 법정에서 원정화의 증언은 매 시기 짜 맞춘 새로운 각본에 따라 달라졌고 초보적 신빙성조차 인정되기 어려웠다. 누명은 언젠가는 반드시 풀릴 것이다.

필자는 그가 기무사 수사관들에게 신문을 받는 과정이 담긴 영상녹화물을 입수해 본 적이 있다. 녹화물에는 황중위를 원정화의 공범으로 몰아 허위 자백을 받아낸 수사관들의 수사 기법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자백을 강요하고, 답변을 유도하며, 모욕적인 표현을 일삼는 신문 과정이 나온다. 보는 이라면 누구나 허위 자백을 하지 않고는 못 배겼을 것이라고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녹화 중에 수사관은 진술거부권을 고지하지 않는데 조서에는 고지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럼에도 황중위는 조서 말미에 서명날인을 했다. 원정화의 피의자신문조서를 보여주며 원정화의 진술에 맞춰 자백하도록 강요하는 장면에서는 반말과 모욕적이고 위협적인 표현이 계속 들렸다. 자백하면 사면해주겠다는 회유 또한 빠지지 않았다.

녹화물에서는, 주신문관이나 참여수사관이 아닌 과장이라는 어떤 사람이 조사를 개시하고 주도하고 있다. 과장이라는 자는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도 않고 미란다 경고는 생략한 채 다짜고짜 반말로 조사를 시작했다. 황중위는 과장이라는 사람이 강압적인 수사를 시작하면서부터 조사 분위기가 그 전과는 완전히 변했다고 한다. 피의자신문조서에 전혀 이름이 나오지 않는 사람이 조사를 주도하면서 결국 허위 자백을 받아낸 것이다.

 

이름 모를 과장이라는 사람이 신문 과정에서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 녹화물을 통해 짚어보자.

기억이 안 난, 모른다, 이건 안 되잖아.”

근데 원정화하고, 그런 관계가 아니다, 특별한 관계다라고 했을 때는 기억이 안 난다라는 얘기는 진술을 안 하겠다는, 부인하겠다는 소리야.”

큰 거 아니야. 바로 진행되는 것들을 알게 될 거야. 사실을 숨겼을 때는 엄청난. 기관에서 간첩이 진술한 내용을 그냥 묻히고 아니라고 하겠어. 그 엄청난 교육을 받은 사람이 간첩이라고 하면서 (황중위와의) 관계를 다 얘기했는데, 우리가 황중위의 말을 믿겠어, 원정화의 말을 믿겠어?”

단독으로 혼자 한 거면 혼자 가지고 가면 돼. 그런 행위에 대해 원정화가 알고 있고 진술했다. 그런 부분에 대해 자꾸 진술을 부인하고 허위로 진술하고 그러면 그게 참 문제다. (황중위가) 한 행위에 대해 떳떳이 얘기를 못 하는 것은 제가 분명히 인식하고 있고, 아직도 자기 행위를 반성하지 못하고 숨기려고 하는 거야. 그런 모습들이 내 눈에 보여. 절대로 그렇게 해서 끝날 문제가 아냐. 어떻게 빨리 매듭을 짓고 싶다며. 매듭을 짓기 위해서는 사실을 진술하는. 빠른 시간 내, 오늘 당장이라도 매듭질 수 있어. 앞에서와 같이 그런 태도로 하면 시간이 엄청 길어진다. 길어지든 짧아지든 사실은 분명히 밝혀질 수밖에 없다. 해결은 황중위가 하는 거야, 우리가 하는 게 아니고. 어떤 태도를 보이는 데에 따라 빨리 아니면 길게. 그러나 결과는 똑같다. 어떻게 생각해? 계속 이렇게 일관되게 갈 거야. 빨리 사실대로 진술해야 빨리 매듭이 지어질 거야. 내 얘기가 뭔 얘기인지 이해가 안 되나? 그건 아니잖아. 고민하고 머릿속에 정리가 돼 있잖아. 틀려, 내 말?”

근데 얘기를 하기 싫은 거야, 뭐야, 지금?”

정리할 시간을 좀 더 줄까? 마음의 정리를 하라는 거는 변명할 시간을 주겠다는 게 아니야. () 여기서 얘기를 할 거냐, 변명으로 일관할 거냐? 머리 굴리지 말고 분명히 사실을 규명해야 한다고 얘기했잖아. 황중위가 얘기를 하든 안 하든 사실은 분명히 규명된다. ? 상대방이 있으니까. 얘기를 할지 말지. 우리도 방향을 정해야 할 것 아니야. 황중위한테 질질 끌려 다니는 수사는 아니니까. 황중위가 결정하는 대로 우리는 그 방향으로 간다.”

이름 모를 과장이 신문을 주도하는 동안 주신문관은 내내 옆에서 참관했다. 그러던 중 과장이 원정화의 조서를 황중위에게 보여주는 과정에 끼어들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떻게 해서든지 조금 스스로 진술할 수 있도록 만들어가지고 죄를 좀 사면하려고 하시는데, 뭐야, 황중위, 진짜 이런 식으로 나오면. 내가 얘기했잖아. 한 명이 진술하면 (다른) 한 명이 진술을 거부하더라도 누가 인정받는다고? 얘기했잖아. 둘 다 같이 해놓고 한 명은 얘기했다고 하고 한 명은 안 했다고 했을 경우 누가 처벌받는다고? 그것도 얘기했잖아. 내가 첫 회부터 했어. 오늘 최종 마지막으로 과장님이 얘기하시면서 황중위한테 조금이라도 사면하게 해주고 변명을 듣겠다고 하시는데, 이런 식으로 하는 게 도리가 아니잖아, 지금. 얘기하는 자체가 모든 것을 확보해놓고 얘기하는데도 1회부터 6회까지 내가 조사하면서 허위라는 사실을 알면서 내가 계속 받았어. 본인 진술을 한번 들어봐도 지금까지 묻는 말에서도 일치되는 게 많아. 마지막으로 황중위를 생각해서 과장님이 진짜 변명의 여지를 듣고, 또 황중위가 사랑했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했다, 그걸 감안하기 위해 얘기하시는 거지. 본인을 처벌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고. 처음부터 얘기했잖아. 죄를 졌으면 처벌받겠다고, 피의자 신분 되겠다고.”

했으면 사실을 떳떳하게 얘기하고. 원정화가 황중위를 처벌하기 위해 저렇게 허위 자백하는 거야? () 그래서 최종 마지막으로 묻는 거야. 이 마지막이라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의미야. 마지막이라는 의미가. 황중위가 계속 부인하고 아니라고 했을 경우에 법을 집행하는 수사관으로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죄를 잡을 수밖에 없어. 과장님이 하신 말씀을 다시 되새김하고, 내용 봤으니까 이거 안 보여주고, 과장님은 그래도 선처하자, 감안하자, 이런 취지에서 말씀하시는 건데, 그걸 모르고 얘기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내가 답답해서 중간에 끼어든 건데, 다시 한 번 생각하고 사실대로, 이게 마지막일 것 같다, 내가 하는 말. 과장님이 받아들이는 마지막이라고 생각되니까, 사실대로 진심 어린, 사내답게 남자답게 육군 장교답게 선처해달라, 그 말도 좋고, 원정화를 감싸고돌면 한도 끝도 없으니까, 알아서 해. 지금부터 진술은 마지막이라고 했어. 내 인내심은 마지막이야. 과장님은 모르겠지만, 내 인내심은 마지막이야.”

이러한 수사관의 추궁 내용은 조서에 전혀 기재되어 있지 않다. 조서의 작성자나 참여자가 아닌 이름 모를 과장이 피의자 신문을 주도하고 추궁해 허위 자백을 받아낸 이상, 그 사람을 법정에 증인으로 세워 신문해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과장의 인적 사항조차 특정해주지 않았고 끝내 증인신문은 무산되었다.

또 수사관은 휴식시간 등을 이용해 조사실 밖에서도 황중위를 집요하게 회유했다. 녹화물에서 휴식시간 이후 조사 과정이 나오는 부분을 보면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나한테 얘기한 말, 월요일 날 술 먹고 한 행동하고 언동하고. () 한번 써보세요. 오늘 날짜 쓰고. 진술서를 오늘 그것으로 받을 거니까. () 30분 동안 휴식을 했고 많은 생각을 하면서 수사관한테 사실대로 진술하는 것이 저뿐만 아니라 부모님에게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서 추가 진술을 하고자 합니다. 맞습니까?”

필자는 이를 수사관이 휴식시간에 조사실 밖에서 갖은 강요와 회유로 황중위에게서 허위 자백을 이끌어낸 다음 조사실에서 다시 확인하는 방식으로 조사를 개시하는 것으로 본다. 또 영상물에는 내가 물어보고 했던 내용을 남이 보더라도 의구심이 들지 않도록이라고 말하는 장면도 나온다. 조사를 마친 상태에서 영상녹화가 계속되고 있는데도 카메라가 꺼진 줄 알고 황중위에게 또 이렇게 말한다.

처벌받을 거 안 두려워요?”

황중위가 두렵죠라고 대답하자 허위 자백한 사실을 비꼬듯이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두려운데 왜 그렇게 진술했어요?”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한지 궁금하다. ‘그래도 그렇지. 장교라는 사람이 기무사의 저런 추궁에 허위 자백을 한단 말인가하고 생각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수사관이 피의자의 혐의 사실을 직접 목격하거나 경험했다는 참고인과 목격자를 찾아내 허위 진술을 하게 사주한 다음, 피의자에게 그 허위 진술에 맞춰 진술하도록 몰아가면 벗어나기 어려워진다. 피의자가 수사관이 미리 쳐놓은 올가미들에 걸리지 않고 살아서 나가기는 정말 힘든 일이다. 변호인이 옆에서 돕지 않는 이상 피의자는 올가미에서 벗어날 수 있다.

간명한 조언, ‘미란다 권리를 행사하라

 

변호인의 입장에서 피의자 신문을 받게 되는 시민에게 해줄 가장 간명하고 훌륭한 조언은 무엇일까? 변호인의 도움을 받고 함께 피의자 신문 과정에 출석해 진술거부권이라는 미란다 권리를 행사한 다음, 오래 머물지 말고 나오거나 구속 피의자라면 퇴거를 요구하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고 보니, 신문 과정에서 항상적으로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여력이 있는 일반 시민은 얼마나 되겠느냐는 질문에 봉착하게 된다. 필자의 조언이 자금력이 충분해 변호인을 손쉽게, 언제든 선임할 수 있는 부자들에게나 통할 수 있는 빛 좋은 개살구같은 것 아니냐는 비판에 직면한다. 필자의 이야기가 변호인을 선임할 경제적 능력이 있는 부자들을 위한 조언으로 변질될 우려가 있다. 부자 피의자들이 변호인의 도움을 받아 미란다 권리를 현실에서 실제 어느 정도 행사하고 있는지와 별개로, 그들이 그런 선택의 기회를 언제든 누릴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사법 절차의 빈익빈 부익부, 또 하나의 유전무죄 무전유죄 현상이고, 불공평하고 정의롭지 않은 현실을 조장하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최근에 방위 산업 비리 의혹으로 체포된 한 인사가 진술거부권을 행사해 수사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언론 보도를 접하면 그런 비판이 기우만은 아닌 것 같다.

수사기관의 신문 과정에서 피의자에게 방어를 위해 변호인에게 도움을 받을 권리는 필수적인데, 이를테면 무기 대등의 원칙을 실현하는 데서 현실은 불평등하다. 이러한 아이러니를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 저소득층은 말할 것 없고 대부분의 서민들은 비용이 부담되어 변호인을 구하거나 신문 과정에 참여해달라고 요청할 형편이 못 된다. 그래서 시민들에게 변호인 참여권과 미란다 권리를 행사할 기회를 보장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제도를 시행할 것을 제안한다. 관계 당국과 변호사 단체와 함께 협력하면 충분히 시행할 수 있다고 본다.

 

피의자 신문 과정에서 변호인을 선임하지 못한 피의자를 위해 최초 1회 피의자 신문에 한해서라도 변호사 단체가 선임해주는 변호인의 조력을 받게 하자. 2시간(재정 형편 등 여러 사정에 따라 조정하면 된다)을 초과하지 않는 범위에서 영상녹화 조사실에서 피의자 신문을 받도록 의무화하기를 바란다. 현재 변호사 단체에 소속된 변호사 수와 재정 형편에 비추어보면, 변호사 단체에서 자력이 부족한 서민을 위해 2시간가량 피의자 신문에 참여할 변호인을 선임해주고 피의자를 대신해 참여한 변호인에게 수당을 지급하는 것이 충분히 가능하다. 그렇게나마 최초의 피의자 신문 과정에서 변호사 단체의 지원으로 변호인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얼마간 평등한 미란다 권리 행사가 보장된다. 그리고 변호인의 도움을 받는 가운데 1회 피의자 신문의 전체 과정을 동영상으로 녹화하고 조사 시간을 2시간 정도로 제한하면, 피의자의 헌법상 권리를 평등하게 보장하면서도 실체적 진실을 규명하려는 수사의 목적에도 부합할 것이다.

 

초고.피의자신문의비밀.장경욱.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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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국가보안법 전문 양심수후원회 2021.04.16 190
45 국가보안법 왜 폐지인가?(민주노총 자료집) file 양심수후원회 2021.04.08 218
44 2014 2015 국가보안법적용 실태 file 양심수후원회 2016.06.20 1443
43 비전향장기수 추모행위에 대한 국가보안법위반 사건의 대법원 무죄 확정 판결을 환영한다. 양심수후원회 2012.05.25 9229
42 '월북(?)' 기장 수사, "전형적인 마녀사냥 수사" 양심수후원회 2011.10.26 9733
41 해도해도 너무 하는 국가보안법 탄압! 김은혜씨를 즉각 석방하라! 양심수후원회 2011.10.17 9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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